바다 쪽으로, 한 뼘 더
One Step More To The Sea , 2009

눈뜨면 사랑이 와있을거야
대형 극장들에서 상영되는 화려한 영화들 속에 우리의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소소한 영화들이 있다. 바로 독립영화들이다. 천만 관객 시대가 왔다고는 하지만 들춰보면 정말 보석 같은 수작들이 많은 독립영화야말로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주목받아야할 작품들이 아닐까? 오늘 리뷰 할 영화는 영화 <바다 쪽으로, 한 뼘 더>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엄마와 딸인 연희와 원우이다. 성인들 중 0.1%가 앓고 있다는 병인 기면증을 갖고 살아가는 여고생 원우와 그녀의 엄마인 싱글맘 연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시험을 보다가 수업을 하다가 혹은 걷다가도 기면증의 증상으로 기절하듯 잠에 빠져버리는 원우와 그녀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연희의 일상에 마치 바다와 같은 파도기 치기 시작한 것이다. 소년 준서와 청년 선재의 등장과 함께 일렁이기 시작하는 이들의 일상은 과연 어떻게 될까?
영화 <바다 쪽으로, 한 뼘 더>에는 다른 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 없다. 자극적인 소재나 충격적인 사건, 극적인 반전들은 없지만 이 영화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우리의 삶과 이어지듯 연장되는 꾸밈없는 삶, 과장 없이 보여 지는 일상 그대로의 삶이 바로 영화 속에서 펼쳐지게 된다. 다른 영화나 드라마 속의 삶이 아닌 우리의 일상 이대로가 소중하고 가장 특별하고 또한 현실 그대로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마치 이런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듯이 영화 속에는 요즘 영화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컴퓨터 그래픽도 없다. 심지어 세트 촬영조차 하지 않았다. 일상 속에 존재하지 않는 인공적인 거품들은 모두 걷어버린 채 그저 우리의 일상 속으로 영화가 들어온 것인지 영화 속으로 우리가 들어간 것인지 모를 정도로 삶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마당 있는 집, 먼지가 뽀얗게 앉은 다락방, 도자기, 필름 카메라, 맑은 하늘 등의 장면을 통해 보여 지는 스크린 속 세상은 우리가 영화관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목 길목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길을 걷다가 마주친 것 같은 원우와 연희의 일상으로 쉽게 녹아들어갈 수 있다.

많은 독립영화들이 그러하듯이 영화 <바다 쪽으로, 한 뼘 더> 또한 우리의 일상으로 우리를 치유해준다. 각자에게 이런 저런 삶이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마치 트랙을 달리는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살아가야하는 인생의 굴레에 갇혀 주변을 되돌아 볼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통해서 전해져오는 진심과 따뜻한 사랑은 우리의 삶 속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연희역을 맡은 박지영과 원우역의 한예리는 안정적인 연기로 더욱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들과 함께 등장하는 홍종현, 김영재의 연기도 연희와 원우의 삶으로 녹아들어가게 된다.

이들의 삶은 바로 우리 곁에 있다. 누군가는 태어나고 또한 누군가는 삶을 마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만남을 어떤 사람들은 예정된 이별을 경험한다. 사람들은 상처받고 사랑하고 원망하고 설레기도 하면서 인생이라는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영웅들이 지구를 구하고 정치적인 음모가 등장하고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스크린 속 삶보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또한 말 한마디에 위로받는 아주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영화 같다.
 |
|
 |
일상같은 영화를 찾는다면 |
|
| 글: 이현아 (파일조 무비스토리 패널) |
| <저작권자 ⓒ 원하는 모든것 파일조 filejo.com> |
|
<아이다호>에서 리버 피닉스가 길 거리에 쓰러질 때, 기면증은 아웃사이더와 루저에 대한 극명한 은유로 기능했다. <4인용 식탁>에서 전지현이 하늘거리며 쓰러질 때, 그건 그녀의 기이한 능력을 설명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단지 성인의 0.1%가 앓는 다는 기면증은 영화 속에서도 그리 보편적인 소재는 아니었다. <바다쪽으로, 한 뼘 더>는 다르다. 여기서 기면증을 앓는 소녀 원우는 길 잃은 루저도 아니고, 더더욱 영적인 능력을 뽐내지도 않는다. 다만 한창 성장할 나이의 소녀에게 기면증은 세상을 향한 발걸음을 주저하게 만드는 일종의 장애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장애를 신파로 그려낼 생각이 추호도 없다. 담담한 일상을 쫓아가는 카메라는 원우를 위무하려 들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러한 담담함이 이 영화의 빛나는 장점이다. 원우는 시도 때도 없이 쓰러져 잠이 드는 기면증을 앓고 있다는 것 외에는 지극히 평범한 여고생이다. 또 하나, 일찍 아버지를 여위고 점토 공예를 강의하는 40대 초반의 엄마 연희, 그리고 외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다. 딱히 큰 사건 없이 나른한 일상을 보내던 원우와 연희에게 각각 같은 반의 무뚝뚝한 친구 준서와 사진을 강의하는 선재가 다가선다. 상업영화의 문법을 따르자면 두 커플의 로맨스가 알콩달콩 펼쳐져야 할 것 같지만, 최지영 감독은 그렇게 쉬운 길로 빠지지 않는다. <바다쪽으로, 한 뼘 더>는 온전히 원우와 연희의 심경을 섬세하게 풀어나가는데 주력한다. <바다쪽으로, 한 뼘 더> 시놉시스나 캐릭터를 놓고 봤을 때 어쩔 수 없이 <...ing>와 비교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영화다. 불치병을 앓고 있는 여고생 딸과 이를 안타깝게 지켜봐야 하는 친구 같은 엄마와의 관계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죽기 직전 생긴 남자친구와의 로맨스와 동등하게 엄마의 모성애를 파고 큰 감정의 진폭으로 그려내는 <...ing>와 비교했을 때, <바다쪽으로, 한 뼘 더>는 한층 더 성숙하고 진중하다. 일례로 원우와 연희의 로맨스를 그리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첫 만남의 설레임이나 아픔을 그리는데 열중하지 않는다. 그저 그러한 관계조차도 생의 자잘한 일상의 한 부분과도 같다. 그래서 원우의 감정에 영향을 주는 것은 남자친구와의 데이트가 아니라, 엄마가 아버지를 잊지 않았을까 하는 서운함이 먼저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연애'란 사건이 아니라 삶을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시선 자체다. 고즈넉한 화면과 여유로운 편집의 리듬감 또한 그러한 관조적인 시선을 가능토록 도와준다. 그렇게 <바다쪽으로, 한 뼘 더>는 사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우리네 삶의 일상을 그대로 닮아 있다. 한편으로 영화는 <...ing>외에 이와이 슈운지의 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무뚝뚝하지만 "자식이 목구멍으로 음식 넘기는 소리"가 가장 듣기 좋다는 말처럼 선문답 같은 한마디로 인생의 정수를 논하는 외할머니는 <러브레터>의 주인공의 할아버지를 연상시킨다. 특히나 영화가 끝나기 직전, 마당 밭을 일구던 할머니가 원우의 아버지가 예전에 지붕에 던져놨던 원우의 치아를 건네주는 장면은 <러브레터>의 후반부의 그 아련한 감정과 엇비슷하게 닮아 있다. 또, 다락방에서 오래된 카메라를 꺼내든다든지, 구급차에 실려간 할머니와 원우의 쓰러진 장면을 교차시킨 일종의 트릭, 그리고 여고생 원우의 심드렁한 모습 등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과거지향인데다 아련한 감정을 극대화시킨 몇몇 이와이 슈운지의 연애담과도 닮아 있지만, <바다쪽으로, 한 뼘 더>는 그 중에서 영화적인 과장이나 수식을 탈색시켜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극적인 장치에 방해받지 않고 담담하게 원우의 성장담을 따라가게 된다. 어찌 보면 심심할 수 있을지 모르는 담담함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두 배우의 가감없는 연기다. 실제 26살이지만 고등학생 연기를 탁월하게 소화해낸 '절대 동안' 김예리와 <우아한 세계>의 호연 이후 독립영화에 출연한 박지영은 안정된 호흡을 보여준다. 그래서 두 사람의 편안한 연기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90분의 러닝타임이 훌쩍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다.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로 삶과 성장에 대해 진중하게 성찰하는 <바다쪽으로, 한 뼘 더>는 한국영화의 성장영화 목록 최상단에 이름을 올리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2009년 5월 22일 금요일 | 글_하성태 (woody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