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들
GRASS, 2017
오지호와 윤진서가 나오는 <커피메이트>라는 영화가 있다. 카페에 나와 자주 혼자 앉아 있던 윤진서, 그리고 그녀를 보고 말을 걸어온 오지호. 그렇게 그들은 카페를 둘만의 공간으로 채워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커피메이트가 된다. 카페 밖으로 나가면 이 둘의 관계는 무너질 것이라는 막연한 걱정도 있고, 카페 밖에서는 카페 안에서와는 다른 모습으로 서로를 대해야하는 부담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카페에 앉아서 서로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과거를 끄집어내어 펼쳐놓는다.
그들이 앉아 있던 카페가 북촌으로 가는 길가에 있다고 하는데, 이 영화 <풀잎들>에 나오는 카페도 그 근처라고 들어서 두 영화가 매우 낯익게 느껴진다.
허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일 수 있다. 오지호와 윤진서가 마주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들은 끝없이 이어져서 혹여 빠뜨릴까 신경이 쓰인다면 이 영화는 주인공 아름(김민희)와 같이 카페에 와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같이 엿들어주면 될 뿐이다.
즉, 주인공과 함께 귀를 열고 관찰자가 되면 그 뿐.
낮부터 밤까지, 오후 내내 이어지는 이 사람들의 관찰일지는 홍상수 영화가 그동안 그렇게 보여주었듯이 발군의 스토리를 한아름 던져준다. 그렇게 쏟아지는 이야기를 아름은 끄적거리며, 속마음을 내보이며 메모를 하거나 시니컬하게 흘려 내보낼 뿐이다.
영화에는 나름대로 진지한 사람들의 모습이 흑백의 화면 가득 무채색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총천연색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이리저리 통통 튀어다닐 지경이다. 그들은 마치 순서표를 받아 입장한 것처럼 카페에 차례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대화를 시작한다.
남자와 여자는 어느 친구의 이야기를 하는데 그 친구는 죽음을 맞이했다. 그 죽음에 대한 책임을 여자는 남자에게 묻고 남자는 방어한다. 이 둘은 그 죽음에 과연 어떤 관계일까.
어느 늙은 남자는 기거할 곳이 없어서 후배의 집에 빌붙을 것에 열심이다. 연극처럼 들리는 이들의 대사는 그들이 어느 극단에 있었다는 것을 추리하게 해준다. 삶이 한꺼풀 기울어진 나이에서 제 몸 하나 뉘일 곳을 찾는 선배의 모습에 후배의 이야기는 이 좁은 카페의 공간을 낯설게 채운다.
어느 선배 작가는 후배 작가에게 작품을 제안하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제안하고 거절하고 낙심하고 난처해한다. 그런 대화들을 듣고 있다보면 카페 밖에 있는 풀잎들이 자연스럽게 보이는, 자연 친화적인 감정이 생긴다. 아무렇게나 나와서 광합성을 하는 풀잎들은 관상용도 아니고 고급스러운 어떤 조경도 주지 않는, 평범하고 오히려 못생긴 식물인데 인간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이 녹색의 풀잎을 보는 것이 마음 편하게 느껴진다
그런 마음을 이 카페의 인물들도 공감하는지, 이들도 카페 밖에 나와서 잠시 풀잎들에 눈길을 준다. 의도를 가지고 주는 게 아닐테지만 이들의 시선에는 풀잎의 존재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지는 않아 보인다.
저 풀잎들과 지금 나의 신세가 같이 보이는 것일 수도…
홍상수감독과 김민희는 의외로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내고 또, 의외로 호평을 받고 있다. 한국의 영화감독 홍상수는 해외에서 그렇게 명장의 반열에 올라서 어떤 풍파에도 흔들림 없이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김민희의 표정은 지루하지도 생생하지도 않지만 독백처럼 들리는 이야기는 뾰족한 창처럼 카페 손님들의 이야기를 콕콕 찌른다. 아름은 아마도 이들에게 전혀 동화되거나 공감하지 않는다는 것이 홍상수 감독의 의도일 수도 있다. 흑백으로 처리된 화면은 그래서 거짓과 참의 구분을 명확히 하지만 회색 지대에 놓인 부분은 탁 잘라서 말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홍상수 감독의 초기작 <오! 수정>을 제일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이 회색 지대에 놓인 부분을 홍상수 영화는 피해가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같은 상황, 같이 겪은 시간에서 각기 다른 말을 해대는 <오! 수정>의 장면 배분은 바로 회색 지대에 대한 숨김없는 당당함이자 이 후로 나온 흑백영화들에 대한 선전포고와 같다.
오후 내내 쏟아지던 이야기들은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서 흩어진다.
그렇게 많은 말과 이야기를 들었는데 영화의 러닝타임은 겨우 1시간 조금 지났을 뿐.
긴 오후가 지난 줄 알았는데 아직 해가 짱짱하다니, 그런 느낌을 받는다. 주섬주섬 자리를 챙기고 아름이 떠나는 자리에는 이 후에는 계속해서 사람들의 이야기는 쏟아질 것이다. 그 자리를 다시 어떤 홍상수의 수다가 다가올지 기대가 된다.
홍상수와 김민희는 아직 할 말이 많은 것 같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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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영화를 좋아하는 분 모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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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C-Guy (파일조 무비스토리 패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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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깊숙이 자리한 어느 작은 커피집. 내부에 자리 잡은 젊은 남녀는 언성을 높이며 서로 자신이 더 괴롭다고 감정을 쏟아낸다. 그 옆 테이블에는 무대를 떠나 실직 상태에 놓인 듯한 힘 없는 장년이 후배에게 거처를 부탁하고 후배는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한다. 커피집 밖에 놓은 작은 테이블에는 작가 지망이라는 중년 남자와 작가라는 젊은 여성이 글 쓰는 것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눈다. 이렇듯 홍상수 감독의 신작 <풀잎들>은 한 공간을 공유 중인 타인들의 이야기를 흑백 영상 안에 담는다. 따로 또 같이 공간을 점유하고 누리는 인물들은 젊은 여성 관찰자(김민희)의 시선 속에서 자신들도 모른 채 헤쳐 모여지는 중이다. 홍 감독은 관찰자의 내레이션을 통해 아마도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멀리서 바라보자면, 한심해 보일 수 있겠지만 함부로 재단하지 말지니. 다 자기 나름의 치열한 삶을 사는 이들이다. 마치 서로 의지하며 비바람을 이겨내는 풀잎처럼 말이다’라고. 김민희, 정진영, 기주봉이 함께했다. 올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부문 공식 초청된 작품이다.
2018년 10월 24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