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본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밀양>이지만, 어린 시절 부모님이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보시던 <박하사탕>이나 <오아시스>를 희미하지만 같이 본 기억 때문에 그의 영화가 어떤 분위기를 풍기는 지는 이미 어릴 적 기억들이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오아시스> 속에서 뇌성마비 장애인과 전과자, <박하사탕> 속 명대사 나 다시 돌아갈래!, 그리고 오늘 <밀양> 속 이신애 (전도연 분)의 모습들은 이창동 감독의 세계가 얼마나 잔인하고 극악무도한지를 잘 설명해준다.
<밀양>의 세계도 마찬가지로 잔인하고 우울하다. 남편이 죽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아이와 함께 내려온 이신애는 피아노 학원을 차리고 열심히 살려고하지만, 약 2시간 30분 가량의 러닝 타임을 가진 영화가 시작한지 40분도 안되서 아이는 유괴를 당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종교를 믿고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해 마음에 평온함을 얻으려했지만, 이미 자신과 똑같이 종교를 믿고 신에게 용서를 받았다는 범인의 환한 얼굴을 보고 신애는 이내 광기를 표출하기 시작한다.

신애가 교회에 대해 구원에 반대되는 파괴의 모습을 통해 광기를 표출하는 이유는 그녀가 살아오면서 취한 행동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것은 소리없은 참음. 남편이 바람을 피울때도 모르는 척 하면서도 그녀가 마음에 들끓던 억울함과 분노를 참아온 이유는 그러한 행동이 현재의 상황이 빨리 지나가기 위한, 그리고 나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은 결국 잊을 수 없는 기억들도 남기고, 분명 남편을 잊고 싶어서 서울에서 내려온 그녀도 어느 순간 남편의 고향, 밀양에 당도했다.그리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가 부패한 시체로 발견되었을때, 그녀는 똑같이 그녀를 죄어오는 분노와 슬픔을 참기 시작한다.
꺼억꺼억, 그녀는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가득 채운 열분을 종교를 통해 토해내려 하지만, 자기 자신도 아들을 죽인 범인조차도 구원할 수 없다고 느낄 때, 그녀의 내면 속에 쌓였던 분노는 자기 대신 맘대로 범인을 구원한 신을 향하고, 그녀가 쏟아내는 분노도 교회와 신을 향한채 광기로 돌변한다. 지면에는 오직 토해낸 광기의 흔적만이 남긴채, 더 이상 토해낼 것도, 참을 것도 없는 그녀가 손목을 그을땐, 관객들은 그녀의 심정을 이해하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이윽고 붉은 혈액이 뿜어져나올때, 그녀는 갑자기 거리로 뛰쳐나가 사람들을 붙잡고 호소하기 시작한다. 살려주세요...

신애는 도대체 왜 살고 싶어 했을까? 그녀가 죽더라도 명백한 이유가 있음에도, 살만한 이유가 없음에도 그녀가 길바닥에서 삶에 대한 간구를 외친 이유는 무엇을까? 그녀 자신도 몰랐었던 살고싶은 은밀한 이유는 그녀가 가진 구원의 가능성, 그리고 그녀가 받은 작은 구원에 있다. 영화 초반 신애가 처음 밀양에 도착해 옷가게 주인에게 인사를 하러 왔을때, 신애의 인테리어 조언에 옷가게 주인과 마을 사람들은 쓸데없는 일에 참견한다며 욕을 했지만, 영화의 마지막, 신애의 말처럼 인테리어가 바뀐 옷 가게에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고 이에 대해 옷 가게 주인도 신애에게 고마워한다. 이를 보고 무슨 구원이냐며 과대 해석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는 엄연히 (아주 작지만) 그녀가 가진 구원의 가능성을 정확히 말해준다.
그리고 영화내내 그녀를 뒤따라 다니던 카센터 사장 김종찬 (송강호 분), 신애는 그를 귀찮게도, 별 생각없이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녀를 도와주고 진정으로 생각해주는 종찬. 영화 속에서 중요하지 않게 보이던 그이지만, 그는 앞에서 말하던 신애의 구원 가능성을 넘어서 그녀가 구원할 수 있는 가능성,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 둘 다를 말해준다. 그녀가 있었기에 종찬 역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녀를 보살펴줌과 동시에 자신의 모습도 바뀔 수 있었고, 그녀 역시 계속해서 종찬에게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 흩날리는 신애의 머리카락과 함께 이창동 감독의 카메라는 마당 한 켠 구석에 내리쬐는 은밀한 햇빛을 응시한다.롱테이크로 찍어지는 이 장면을 통해 이창동 감독은 이야기를 마무리 지음과 동시에 관객들에게 최후의 메시지를 건내준다.어딘가가 가까이 있을지 모르는 삶의 은밀한 이유를 찾으라고, 그 은밀한 이유를 찾아서 봤을때야 비로소 삶을 사는 명백한 이유가 생기니깐 말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과 상황들이 좀 더 쉽고 더 많이 가슴에 와닿는 이유는 영화 속 이야기가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에 존재한다. 격렬한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던 시대에 휩쓸리던 사나이가 있는 <박하사탕>, 범죄좌와 장애인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이 있는 <오아시스>, 그리고 <밀양>까지... 이창동 감독은 우리 사회 속에 숨겨진 구석들을 밝히어 그 모습들을 카메라로 담아왔고, 이제는 밝혀져서 빛나는 구석들이 모여 사회 전체를 밝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밀양> 과 이창동 감독의 세계관은 구석 구석을 내리쬐어 전체를 본다는 점에서 서로 상통한다. 그 동안 이창동 감독이 <박하사탕>과 <오아시스>를 통해 우리 사회의 등잔 밑을 밝히는데 힘 써왔다고 한다면, <밀양>은 밝혀진 구석들을 통해 사회를, 그리고 그 사회를 이루는 인간의 본질을 관통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처럼 <밀양>이라는 이 영화가 가지는 깊이는 좀 처럼 헤아릴 수가 없다.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을 살피는 이러한 영화들을 보자면 언젠가 정성일 평론가가 말했던 말이 생각한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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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사는 이유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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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시네박 (파일조 무비스토리 패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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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똑같아예. 뜻보고 사는 사람 있습니꺼? 그냥 살지예.” 종찬(송강호)의 대사처럼 밀양은 우리가 아는 그 곳들과 마찬가지로 결코 특별하지 않은 공간이다. 다만 그 안에 머무는 사람들까지 평범한 건 아니다. 단지 그것이 평범하게 느껴지는 건 우리에게 무관심으로 익숙해진 덕분이다. 그리고 밀양이란 공간의 거대한 수면에 잠식된 개인은 공간이라는 전체 개념으로 인식된다. <밀양>은 평범하지 않은 군상들 안에 내재된 특별한 삶을 휘젓는 작업이다. 밀양이라는 평탄했던 수면은 신애(전도연)로 인해 출렁인다. 마치 철 모르고 날아든 철새처럼 서울에서 밀양으로 서식지를 옮겨온 신애는 밀양이란 평범한 공간에 상주하는 이들의 주목을 받고 이는 곧, <밀양>의 화두를 낳는 구심점으로 발화된다. 사별한 남편이 살아생전 원했던 생의 공간이 밀양이었기에 그를 쫓아 내려왔다고 말하는 신애는 서울 출신이란 품위에 걸맞는 재력을 과시하지만 아이의 유괴라는 밀양의 대접을 통해 그것이 죄다 허세였음을 스스로 구차하게 뱉어낸다. 결국 <밀양>은 신애의 자승자박을 통해 삶이란 궤적을 살피는 작업이다. 신애를 찾아온 남동생을 통해 신애의 남편이 죽게 된 사연을 엿듣게 되는 순간, 이미 그런 사실은 선명해졌다. 결국 남편의 공백을 아들로 메우려 하지만 그녀의 허세는 그마저 상실케 하고, 결국 그 상실은 그녀를 믿음에 귀속시킨다. 하지만 스스로를 강압하던 신앙으로의 도피는 유괴범을 용서하겠다는 결의로 이어지지만, 신으로부터 용서를 얻었다는 유괴범의 평온한 인상에서 다시 자신의 선택이 능욕당했음을 깨닫는다. 결국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찾은 밀양에 대한 배신감에서 신앙으로 도피했던 신애는 그만큼의 배신감을 다시 덧씌우게 된다. <밀양>은 종찬과 신애의 관계만을 살피자면 굽이돌아 안착하려는 로맨스로 이해할 수도 있고, 신애의 뚜렷한 행적을 쫓으면 삶의 허기를 채우고자 방황하는 식탐가 기질의 인간적 욕망으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믿음은 과연 인간에게 구원의 답변으로 소통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 가깝다. 그리고 그 성찰에 박동을 가하고 호흡을 꾀하는 건 전도연, 송강호의 불세출 연기다. 전도연의 처절한 연기가 극의 무게감을 가중시킨다면, 송강호의 허허실실 연기는 피로감을 덜어주는 자양강장제처럼 활력을 덧붙인다. 또한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단역배우들의 예사롭지 않은 범인(凡人)스런 연기는 <밀양>이 지닌 리얼리티 그 자체다.4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전작들에 비해 심오하면서도 노골적인 사유를 드러낸다. 종교적 묘사로 인한 논란의 여지는 <밀양>의 본질과 무관하다. 특정 종교에 대한 혐오라기보단 인간이란 미약한 존재가 절대자의 의지를 읽고 궤적을 쫓는 과정을 되짚는 물음이다. 또한 기독교가 묘사의 대상이 된 건 밀양이란 도시가 이 영화에서 이야기되는 것처럼 별반 뜻이 없다. 단지 대한민국에서 기독교라는 종교가 차지하는 점유율이 보편성의 이미지를 부여하는 덕분이다. 마치 밀양이란 도시의 이름이 <밀양(密陽)>이라는 단어와 중의적으로 혼용이 가능했다는 까닭에 제목으로 지정된 것처럼.종교란 인간이 가둔 신의 그릇에 불과하지 않을까? 신의 뜻을 인간이 헤아리고 따른다는 것이 가당한 건가? <밀양>은 인간의 세속적 믿음이 신의 뜻이라는 명명으로 도피되는 상황을 묘사한다. 신에게 스스로 은총을 간청하는 인간의 천박한 욕망은 메아리를 듣지 못하고 현실의 비극으로 인해 스스로 내동댕이쳐질 뿐이다. 밀양을 찾아가는 신애의 자가용 위에 펼쳐진 하늘이나, 믿음에 대한 배신감을 느낀 신애가 간통을 전도하는 순간 신을 조롱하며 바라보는 하늘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푸르기만 하다. 결국 ‘신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고 말하는 신도들의 믿음과 무관하게 절대자는 존재하는 것만 같다. 다만 구원도 은총도 아닌 존재만으로. 신애가 어제의 비극 안에서 결국 구원을 꾀하고 홀로 배신감을 느끼는 것과 상관없이. 신애가 머리카락을 자르며 종찬이 든 거울을 바라보는 현실과 무관하게 은총 같은 햇살이 마당을 비출 따름이다. 신은 결국 밀양이라는 공간에 내리쬐는 볕으로 인간에게 은총을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만 우리가 그 이상을 요구하며 기도를 남발할 뿐. 결국 허기진 삶을 채우기 위해 헛걸음하던 신애를 끝까지 배웅하는 건 종찬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건 결국 신이라기 보단 오직 인간 본인일지도 모른다.가늠하기 힘든 신의 뜻처럼 <밀양>은 깊게 내리쬔다. 다만 신앙으로 받아들이는가의 문제를 인간이 결정하듯 <밀양>의 온기가 담은 고민을 품을 수 있는가도 관객의 문제일 것이다. 결국 <밀양>은 신보다는 인간에 대한 고찰이며 종교적이라기 보단 철학적 고민이다. 그리고 141분의 러닝 타임은 그 믿음을 시험하는 가시밭길이 될 것이다.
2007년 5월 2일 수요일 | 글_민용준 기자 (kharismania@movi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