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해운대 라는 영화를 극장에서 보질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형 재난영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재난으로만 끝을 내지 않고, 그 안에서 다양하고 너무 난잡한 스토리를 집어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해운대라는 영화를 파일조에서 다운을 받아서 영화 리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영화를 다 보고난 느낌을 한 단어로 정리하자면 ‘이건 뭐야?’ 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윤제균 감독의 작품이었던 ‘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 , ‘ 퀵 ’ 으로써 나름 저에게 기억이 남는 감독으로써 남겨져 있었는데요, ‘ 7 광구 ’ ‘ 해운대’ 는 정말로 제 생각으로는 별로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뭐 차차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할 것인데요. 예전에 봤던 CG영화인 디워 보단 괜찮았지만, 그렇다고 돈을 내고 보지 않았다는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1145만의 관객을 동원한 이 영화의 리뷰를 한번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 가장 기억에 남는 쓰나미는 인도네시아 쓰나미 입니다. 2004년도에 일어난 쓰나미는 9.3 강진을 동반하여 20만명 가까이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러한 쓰나미를 주제로 한 해운대라는 영화는 2009년 7월에 한국에 개봉을 하게 됩니다. 실질적으로 한국에서 재난영화가 흥행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제가 지금도 가끔 보는 ‘투모로우’ 는 다시 봐도 질리지 않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만든 재난영화인 해운대는 우선 캐스팅부터 호화스럽습니다. 엄정화, 하지원, 설경구, 박중훈, 이민기, 김인권, 송재호 등 주연이면 주연 조연이면 조연 빠지지 않는 스타들로 가득 찼습니다.
우선 관객들은 첫 번째 관객이 관심 있어 하는 스타들로 하여금 영화에 관심을 갖습니다. 실질적으로 영화 ‘아저씨’ 같은 경우 600만을 돌파했습니다. 엄청난 스케일이 있지는 않지만, 원빈 하나로써 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원빈 효과라고도 볼 수 있지요.( 물론 원빈이 영화에 나와서 인지, 영화가 원래 잘 만들어져있지만 원빈 빨을 더 받은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요.) 또한 최근에 개봉한 더 테러 라이브 같은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하정우라는 배우의 원맨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테러 라이브 같은 경우도 540만명을 돌파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관객들은 “ 아 하지원이 나오는 영화? 봐야 겠군” 이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스타들의 스타성을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영화 해운대는 할리우드의 CG 담당자인 한스 울릭을 데려왔습니다. 그를 불러들였으니, 영화에서 어느 부분 그의 역할이 도드라지겠지요. 저는 앞서 말씀드린 것 처럼 재난영화나 눈물 짜내기 영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눈살이 찌푸려 집니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감상평은 비슷합니다. CG가 해외에 비해 별로였다. 또는 감동이였다. 라는 평이지요. 이렇게 평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관객들이 그만큼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리뷰어의 개인적인 생각은 별 5개 중에서 2개 반 정도 줄 것 같습니다.
110억이라는 거액의 비용을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토리가 없는 것은 크나큰 문제입니다. 단지, 감독의 웃기는 장면과 울리는 장면, 그것들을 거대한 해일이 몰아쳐 해소시키거나 더욱 갈등시키는 그런 것이 전체적인 요소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렇다고 해서 망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라는 것에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40%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한다면 그 영화는 대중적으로 성공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실패했다고는 보기 어렵지만, 제 개인적인 평으로는 아쉽다 정도인 것 같습니다.
쓰나미라는 요소는 생각보다 우리에게 특이하게 다가올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ex)연가시도 이와 같지요.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쓰나미는 대체 언제쯤 오게 될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쓰나미는 언제쯤 올까요? 안보신 우리나라 인구의 1/4 관객을 위해 킵 하겠습니다. 물론 재난 영화라고 해서 지속적인 재난이 생기지는 않겠지요. 보통의 할리우드의 재난영화는 재난 영화의 시초가 먼저 보입니다. 즉, 증거가 여러 포착되지요.
하지만 그것을 묵살 한 후 다시 그 증거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게 되자, 그들은 후회를 하고 반성을 하고 그것을 받아들인 후 다시 평화 속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좀 다릅니다. 평범한 규칙과는 다르다고 생각이 들지요. 영화에서 쓰나미는 나쁜 역할이라면 나쁜 역할이지만, 인물간의 갈등 해소의 역할을 결국 하게 되는 것도 쓰나미 입니다. 그래서 아이러니 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쓰나미가 지속적인 긴장감을 유지시켜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합니다. 즉, 3/4 이라는 전체 영화의 인물 대사를 조금 더 간소화 하고 쓰나미에 대해서 더욱 넣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보통의 관객들은 그러한 쓰나미가 나와서 관객들이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고, 앞으로 헤쳐 나가는지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지고 이 영화를 봤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2시간이라는 긴 시간동안, 한 편의 드라마를 보듯이 그냥 그렇게 흘러 갑니다. 이 영화의 정체성이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해양 구조원의 환경에 대한 비판 ? , 부잣집 아들에 대한 설정은 과연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위험할 땐 같이 대해주어야 한다? , 환경을 지키자 ? 등 이상하게 설정을 해놓은 장면들 때문에 왜 이게 들어갔나를 생각하게 합니다.
쓰나미의 속도는 평균 깊이 4,000m에서는 시속 700km 초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왜 적었냐면, 영화의 해소부분은 정말 인물 들간의 이해관계가 없이 쑥 지나갔습니다. 한마디로 다 없앴다. 또한 쓰나미가 지나간 후도 이상하다. 모든 사람들이 엄청 평화스러워 졌다. 물론 죽은 사람은 죽었고 산 사람은 살아야겠지만, 그래도 부모를 잃은 아이는 울어야 정상이 아닌가?
가장 안타까운 윤제균 감독의 방식은 상황을 통해 감동을 일으켜야 하는데, 감동을 위해서 단지 상황만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물의 행동과 생각을 가지고 관객들의 슬픔이나 웃음 또는 공감을 얻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장르였던 것 같고. 감동적인 부분을 의도적으로 만든 느낌? 인스턴트를 먹은 느낌. 그러한 부분은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예전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감독들에게 이렇게 했으니 감동을 받아라. 이것이 아니라 정말로 관객들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이나 기쁨을 얻어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영화비평을 하면서 이렇게 많은 비난을 해본적이 별로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많은 요즘 영화들이 흥행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너무 상업적이나 대중에만 치우친 영화가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혹자는 그렇게 해야 하는 영화계의 현실을 이야기 하지만, 좋은 영화를 만들면 그만큼 사람들이 알아주고, 칸 영화제에도 나가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윤제균 감독의 영화를 많이 봐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영화는 많이 아쉬웠던 것 같습니다.특히.. 광안대교를 덮치는 CG는 정말 실망스러웠습니다. 감독이 많은 다양성을 가지고 영화를 찍는 것에 대해서는 존경스럽습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비평은 이런 것 같다고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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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워 좋아했던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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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이현지 (파일조 무비스토리 패널) |
| <저작권자 ⓒ 원하는 모든것 파일조 filejo.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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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부일체>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색즉시공>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1번가의 기적>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이 질문에 수렴할만한 정답은 <해운대>. 단지 제목은 변경돼야 한다. 또한 바다가 인접한 지역이었을 때 가능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쓰나미를 연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를 다른 이미지로 치환하는 것도 가능하다. 만약 테헤란 거리 한복판에서 지진이 일어나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을 구덩이로 빠뜨리면 그 영화 제목은 <테헤란>이 될 지도 모른다. 농담이냐고? 글쎄.적어도 예고편을 통해 공개된 쓰나미를 기대하고 <해운대>를 찾은 관객이라면 1시간 30여분의 드라마를 견뎌야 한다.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파괴적 장관을 목격할 수 있는 건 분명 그 이후에나 가능하니 말이다. 그 1시간 30여분을 채우는 건 옴니버스적 관계를 형성하는 인물들의 다양한 드라마다. 서사의 시작은 이렇다. 내륙에서 먼 바다까지 어업을 나섰던 배 한 척이 거센 폭풍우에 휘말렸고 그 배에 탑선해 있던 연희(하지원)의 아버지가 무거운 철망에 깔려 있다. 그를 구하기 위해 동료들이 안간힘을 쓰지만 무거운 철망은 꿈쩍조차 하지 않는다. 결국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해 구조헬기에 탑승하게 된 만식(설경구)은 죽음을 방조했다는(, 그리고 그와 함께 병행되는 본질적) 죄책감과 연희를 향한 모종의 감정을 가로지르는 연민으로 연희의 삶을 돌본다. <해운대>는 서사적 할당량에서 우위를 점한 만식과 연희의 사연 외에도 평행 나열되는 둘 이상의 관계를 확보하며 드라마의 너비를 벌린다. 쓰나미를 경고하는 지질학자 김휘(박중훈)와 그의 전부인 유진(엄정화), 만식의 동생인 해양구조대원 형식(이민기)과 서울에서 내려온 삼수생 희미(강예원), 그리고 연희의 동창이자 동네 백수건달인 동춘(김인권) 등, 다양한 인물의 서사가 평행적인 시선으로 나열된다. 다양한 인물들이 제 각각의 사연을 나열하는 것만으로 드라마의 너비는 확장된다. <해운대>는 다분히 전략적으로 사연을 확장해 나간다.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쌓여 올린 드라마가 일거에 초토화되는 순간, 신파의 쓰나미가 밀려온다. 우호와 갈등의 관계 속에서 감정을 쌓아나가던 캐릭터들이 쓰나미 한방에 서로의 손을 잡고 뛰거나 부둥켜안으며 끝을 예감하거나 죽음을 각오한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해운대>가 의도한 궁극의 드라마다. 쓰나미 이전까지의 드라마는 파괴를 위해 축조된 건물이나 다름없다. 진전되는 인물의 관계 속에서 한발씩 전진하는 사연이 거대한 재난 앞에서 일거에 전복되는 비극적 참상은 감정을 고양시키는데 분명 효과적이다. 서사의 층위를 쌓아 올리고, 관계의 너비를 확장하던 드라마가 파괴적 재난 앞에서 일순간 무너지는 광경은 참담한 심경을 부른다. 특히 ‘부산’과 ‘해운대’라는 지정학적 입지는 국내 관객에게 이색적인 기시감을 부를 만하다. 할리우드 재난 블록버스터를 통해 이국적 풍경을 바탕으로 둔 재난 스펙터클을 감상해온 국내 관객들에게 <해운대>가 선사하는 국내 입지의 재난 광경은 보다 생동적인 감정을 야기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 파괴적 이미지가 클라이맥스로서 효과적인 스펙터클을 발생시킨다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분명한 장점이 된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혹은 ‘한국형 재난영화’라는 위용처럼 <해운대>는 160억여 원을 투자한 대작이다. 거대한 쓰나미를 구현한 CG는 분명 할리우드의 수준과 비교하자면 보다 떨어지는 결과물임에 틀림없지만 비용 대비 효과를 감안한다면 배려가 가능한 수준이다. 하지만 <해운대>는 160억여 원을 들여 만든 드라마다. <해운대>에서 쓰나미의 역할이란 그 이전까지의 드라마를 전복시키기 위한 용도로서 기능한다. 생각해보자면 그 전까지의 서사는 너비를 벌릴 뿐, 어떤 갈무리가 없다. 그저 한방의 이미지를 통해 서사적 구조가 일거에 무산되는 형식이다. 그 의도는 불순하지 않다. 다만 그 형태를 따져볼 필요는 있다. 거대한 자본을 투영해서 만들어놓은 인위적 이미지가 사실상 드라마를 파괴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됐다는 건 어딘가 괴상하다. <해운대>는 일상적 풍경의 파괴를 통해 관객의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이는 효과적인 전략이다. 쓰나미로 인해 초토화되는 해운대의 모습 속엔 거센 물살에 밀려나고 정처 없이 떠다니는 비극적 파토스로 가득하다. 일상적 공간이거나 특별한 휴양지로서 ‘해운대’가 지닌 보편성의 특성 안에서 펼쳐지던 그 이전까지의 드라마는 가장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침몰되고 수장된다. 가학적인 유머와 서민적 풍경으로 가득했던 1시간 30여분의 서사가 침몰된 이후로 몰아치는 비극적 신파는 지난 서사의 광경들을 모조리 추억으로 치장해버린다. 엄밀히 말해서 쓰나미 이전까지의 서사가 지닌 단점들을 염두에 둔다면 이건 엄연히 반칙이다. 후반부를 위해 직조된 것에 틀림없는 재난 이전까의 드라마는 개연성을 염두에 두고 조직됐다기 보단 너비를 벌리기 위해 이어 붙인 형태적 사연으로서 종종 선명한 틈새를 드러낸다. 평행적인 비중으로 나열되는 캐릭터 역시 각자 부여 받은 사연의 완성도 안에서 매력의 편차를 발생시킨다. 사실상 <해운대>의 드라마가 뛰어난 밀도를 자랑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모든 (오락)영화가 뛰어난 밀도의 드라마로서 오락적 가치를 평가받는 것도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결론의 형태를 통해 평가를 얻기 마련이다. <해운대>는 자신이 설계한 드라마를 스스로 파괴함으로써 그 평가로부터 한 발 달아난다. 만약 <해운대>가 한국형 재난영화라는 이름으로서 자부할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건 오산이다. <해운대>는 단지 파괴적 스펙터클을 선사하는 이미지를 통해 드라마의 약점을 눈속임할 수 있다는 하나의 전례를 드러낼 뿐이다. 사실상 한국적 환경을 제외하면 <해운대>가 ‘한국형’이라고 불려야 할만한 이유도 막연하다. 단지 그것이 할리우드 대비 저예산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감안해야 결과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해운대>는 할리우드 재난영화들, 혹은 블록버스터들이 곧잘 발휘하는 장점과 곧잘 범하는 단점마저도 하나의 상투성으로 끌어들인 기성품처럼 보인다. 때때로 전시적 욕망을 위해 소모되는 시퀀스가 눈에 띄고, 상황에 걸맞지 않은 유머들이 껑충거린다. 새로운 시도와 모험은 중요하다. 다만 극복할 수 없는 태생적 환경에서 빚어질 결과물의 차이를 인지하면서도 그 방식을 모방하고야 마는 욕망은 도전일까, 허세일까.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과연 실제적 가치인가? 할리우드 재난영화가 쌓아온 데이터 안에서 장단점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모조리 모방해버린 결과물은 과연 한국적인가. 파괴적인 후반부 30여 분의 스펙터클을 위한 볼모로서 쌓아올린 1시간 30여 분의 서사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란 미명을 위한 제물인가? 드라마를 덮쳐버리는 스펙터클의 쓰나미가 결국 '한국형' 방식인가? 자본의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 만들어낸 결과물의 목적은 무엇인가. 매년 여름마다 국내 극장을 독점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맞서지 못할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면 과연 그 용도는 무엇에 있나. 그렇다면 과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아닌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봐야할 이유가 무엇일까. 드라마를 파괴하는 스펙터클, <해운대>는 30여 분의 스펙터클을 전시하기 위해 제물로 바쳐진 1시간 30여 분짜리 임시방편 드라마의 제단이다. 그게 '한국형 재난영화'라 불릴 만한 결과물이라고? 글쎄.
2009년 7월 20일 월요일 | 글_민용준 기자 (kharismania@movi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