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부른다'
★★★☆ 그녀라는 이름의 또 다른 세계
한 침대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는 남녀. 남자가 여자에게 묻는다. "젊은 애가 왜 이러고 살아?" 핀잔 섞인 남자의 질문에 여자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답한다. "내가 사는 게 어떤 데요?" 여자의 되물음에 본인의 질문 의도를 부연하는 남자의 말,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불타는 사랑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상을 달관한 톤으로 자신의 철학을 말하는 여자, "결론은 남들처럼 살지 않는다는 거네요..그런데 모든 사람이 똑같이 살 필요는 없잖아요. 꿈같은 거 희망 같은 거 품지 않고 산다고 나쁜 건 아니잖아요." 조금 특별한 그녀의 이름은 진경(윤진서 분)이다.
건조한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진경의 성격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이 몇 줄의 대사는 영화를 시종일관 이끌어가는 그녀를 관객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일종의 단서다. 강원도 영월, 낡은 극장의 매표소에서 영화 티켓을 끊어주는 일을 하는 진경은 꽉 막힌 공간 안에서 바다가 나오는 TV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며 무료한 일상을 달래는 여자다.
그녀는 자신이 내뱉은 말처럼 꿈, 희망 등의 끈적거리는 것들을 부여잡지 않고 살아간다. 그저 좋아하는 일을 따라 이곳에서 저곳으로 유랑하고, 주변으로부터 들리는 말과 시선은 개의치 않은 채, 자신의 생각과 감정 표현에 최대한 진솔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녀의 진솔한 성격은 종종 상대를 당황시키거나 곤란하게 한다. 그녀의 소통 방식은 한 마디로 '용건만 간단히'다. 간접적 소통 방식에 염증을 느끼는 진경은 상대가 우물쭈물하거나 에두를 때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세요" , "할 말 있어요?"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상대의 말문을 막기 일쑤다.
서론을 건너뛰고 본론부터 툭 꺼내 놓는 그녀의 이러한 소통방식은 경제적일 수 있으나 폐쇄적이다. 자신은 편할지 몰라도 상대는 불쾌할 수 있다. 김 부장(이봉규 분)과 쉬는 날을 두고 옥신각신하는 장면, 경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툭 던지는 진경을 보자. 두 장면에서 그녀는 김 부장과 경호를 이해하거나 배려하지 않는다. 그녀는 왜 그랬을까? 고독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그녀를 변하게 한 건?
그녀가 자기중심적 소통 방식을 갖게 된 배경을 영화는 세 번의 내레이션으로 일러주고 있다. 진경의 목소리로 흐르는 첫 내레이션은 "진경이는 오늘도 혼자 늦은 저녁 밥을 먹는다"이다. 이 내레이션을 통해 처음 진경의 속내가 드러난다. 첩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고백하는 진경은 자신의 탄생 자체를 불경스럽게 여기며 고독을 자처하는 인물이다.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솥 바닥에 찐득하게 눌어붙은 밥처럼, 진경은 자신의 외로운 속을 저 깊숙한 곳에 감금한다. 누구의 강요도 없었지만 그래야 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의 주변엔 직장 동료와 그녀를 좋아하는 세 남자가 있지만, 그녀에게 그들은 '객지'란 단어가 품은 함의처럼 언제든 떠날 수 있는 휴식처일 뿐, 쉽게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가 될 수 없다.
친구 승민의 말처럼 진경은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는 불완전하고 불안한 어른이다. 휴일 여가용으로 유부남 민철을 택하고, 경호의 순애보와 승민의 장난스런 구애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진경의 모습은 그녀가 근본적으로 사랑이란 가치를 부정하고 자신과 맞지 않는 옷이라 여기고 있음을 방증한다.
과장하자면 그녀는 스스로를 누군가를 사랑해서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아서도 안 되는 존재로 특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너는 나를 왜 만나니?"라는 민철의 물음에 "그냥"이라고 쿨하게 대답하는 진경을 나중에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조금씩 그녀에 대해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독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그녀를 변화시킨 건 모친의 죽음과 경호란 남자였다. 모친상을 치르는 내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진경은 발인을 마치고 돌아오며 머무른 냇가에서 자신도 이해하기 힘든 감정에 속상해하며 눈물을 보인다. 그리고 가슴 속 응어리를 욕으로 배설한다.
이때 경호의 목소리를 통해 두 번째 내레이션이 흐른다. "진경이가 욕을 한다" 혼자 늦은 저녁밥을 먹던 진경이가 입 밖으로 욕을 내뱉었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 속 변화를 암시한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알게 모르게 모친에게 의지했다는 것을 자각했고, 성가신 질문으로 치부해버린 모친의 "밥은 먹었니?"란 안부 인사를 그리워했다.
진경은 모친상을 치른 후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녀는 주변사람들에게 관성적으로 위악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사랑하는 경호에게는 본의 아니게 애끊는 속을 보인다. 경호의 순애보에 제대로 화답하지 못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속을 털어놓는 방식으로 경호를 향해 마음의 문을 조금 열어둔다.
다시 돌아온 일상, 어두컴컴한 식탁에 앉아 목구멍으로 잘 넘기지도 못하는 밥을 억지로 입에 밀어 넣는 진경을 위로한 건 경호의 "밥은 먹었어요?"란 한 마디였다. 진경은 이 말을 듣고 왈칵 눈물을 쏟아낸다. 그 모습은 깊숙이 눌어붙은 감정의 봉인을 해제하는 것처럼 폭발적이며 생경하다. 경호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울음소리를 담담히 들어주며 슬픔을 공감한다.
단도직입적이며 도도한 태도, 퉁명스럽고 까칠한 말씨. 모친상 이후 진경의 겉은 이전과 다름없어 보였지만 속은 수리가 필요한 TV처럼 고쳐달라고 소리쳤다. 먹통이 된 TV를 고치러 온 경호에게 자신을 좀 고쳐달라고 말하는 진경은 이제야 자신을 세상과 단절시켰던 고독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진경의 눈에 비친 경호가 모친의 빈자리를 대신하지 않을까 그녀는 그에게 조금씩 기대볼까 한다.
그녀를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던 은주의 목소리로 마지막 내레이션이 흐른다. "진경이가 노래를 한다" 진경은 라디오에서 흐르는 모친의 애창곡 김종찬의 '산다는 것은'을 따라 부르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응원해본다. "어디로 가야하나 멀기만 한 세월, 단 하루를 살아도 마음 편하고 싶어" 란 구절이 그녀의 쓸쓸한 모습과 겹쳐지며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그녀가 부른다>는 인생을 여행처럼 사는 진경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영화다. 다수의 행동방식이 정상이며 우성인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진경은 '비정상적이다, 이상하다'란 소리를 달고 사는 열성 종자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그녀를 좋아하는 세 남자는 정상이고 우성일까? 딱히 그렇지도 않다. 민철은 부인에게 불륜이 발각되자 진경을 미친 여자로 몰아세우고는 염치도 없이 다시 찾아와 엉뚱한 소리를 해댄다. 승민은 진경을 자신의 뮤즈라고 칭송하면서도 장난스런 구애로 진경을 간보는 인물이며, 멀쩡해 보이는 경호도 진경이 불륜남과 만나는 걸 알면서도 진경에게 집착하는 걸 보면, 정상은 아니다.
물 흐르듯 고요한 운치의 영화가 종종 삐걱대는 지점은 이처럼 정상적인 외양을 한 남자들이 죄다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일 때다. 세 남자는 한 눈에 보이는 외모를 제하면, 말투와 행동에 큰 차이가 없다. 모두 어눌하고 엉뚱하다.
세 남자가 진경에게 동화된 것일까? 일부 그런 해석이 가능한 부분도 있지만, 모두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간혹 이렇게 납득하기 힘든 인물들의 성격과 행동 묘사는 종종 실소를 흘리게 하는데, 몇몇은 엉뚱해서 웃기기도 하지만, 다른 몇몇은 엉뚱해서 납득이 안 되기도 한다.
진경 역을 맡은 배우 윤진서는 오랜만에 적역을 맡았다. 진경과 윤진서를 따로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윤진서는 그 자체로 진경이었다. 바늘로 찔러도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지 않은 냉정함을 지녔지만, '팜므파탈'처럼 온 남자의 정신을 홀릴 듯한 그녀만의 매력은 영화 전체를 휘감았다.
<그녀가 부른다>는 윤진서 외에 다른 배우를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윤진서의 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수확은 관객 역시 세 남자처럼 그녀 주변을 맴돌며 그녀의 매력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라는 이름의 또 다른 세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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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윤진서의 매력을 보고 싶은 분!
잔잔한 느낌의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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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JK SOUL (파일조 무비스토리 패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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