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爾: King And The Clown, 2005
영화 <왕의 남자>는 역사적 인물(연산군, 녹수)들의 이야기에 픽션을 더한 드라마적인 영화이다. 실제로 드라마와 영화의 소재로 많이 등장했던 실존 인물인 연산군과 녹수는 단순히 폭군과 요부로 그려졌던 것과 달리, 영화 <왕의 남자>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고독과 아픔을 잘 그려냈다.
실존 인물인 조선의 10대 왕 연산(재위 1494-1506)은 희대의 폭군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인 성종의 후궁을 죽이고, 할머니인 인수대비를 구타하는 등 패악적인 행동으로 인해 역사속에서 많은 지탄을 받아왔다. 이후 중종반정에 의해 폐위되어 쫓겨난 후 1506년에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영화속에서 연산은 그저 아무 이유 없이 패악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친모를 죽게한 아버지와 그의 후궁들에 대한 원망으로 인해 자신의 분노를 삐뚤어진 방향으로 풀어내는 연산의 모습은 어느 순간부터는 관객들의 연민과 동정을 얻어낸다.
너 거기있고 나여기있지?
아니지 너 여기있고 나거기있지?
주인공인 광대 ‘공길’은 연산군일기 중 “공길 이라는 광대가 왕에게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니 비록 곡식이 있은 들 먹을 수가 있으랴’는 말을 하였다가 참형을 당했다(60권 22장)”라는 기록에 의해 다시 탄생한 캐릭터이다.
영화 <왕의 남자>의 소재가 ‘광대놀이’이기 때문에 영화속에서는 내내 아슬한 외줄타기부터 공중제비 등의 곡예가 선보여진다.조선시대의 광대놀이를 재현해낸 <왕의 남자>는 저잣거리에서 백성들의 사랑을 받아온 언어유희, 풍자, 해학 등을 통해 시대를 초월하는 광대놀이의 힘을 보여준다. 이런 완벽한 광대 놀이를 재현하기위해 감우성과 이준기를 비롯해 많은 광대 역할의 배우들이 노력을 했다. ‘안성남사당 바우덕이’를 통해 직접 광대놀이를 배운 배우들은 스스로 훈련에 매진하며 연습을 해나갔다.
연기를 통해 감정을 전하는 것도 힘든데, 광대 놀이를 동시에 해야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특히 감우성은 세계줄타기대회 최고기록 보유자인 명인 권원태 선생에게 직접 줄타기를 배우며 실제 촬영에서도 외줄위에서 능숙하게 걷는 수준급의 실력을 선보였다고 한다.
여봐라, 내 이 광대들을 곁에 두고
내킬때마다 불러 즐길 것이니,
궐내에 이들의 거처를 마련하고,
그 이름은.....그래, 놀 희(戱)에, 즐길 락(樂)!
희락원으로 명하라!
늘 이지적이고 부드럽지만 한편으로는 강단있는 캐릭터를 연기해왔던 감우성은 연기생활에 있어 첫 사극으로 <왕의 남자>를 골랐다. 광대 ‘장생’역으로 다시 태어나 전문적인 광대연기를 펼치기 위해 이미지 변신과 전문적인 광대 연습을 받아가며 노력을 했다.
항상 선 굵은 연기를 펼쳐왔던 배우 정진영은 ‘연산’역을 통해 조선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지며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있지만, 몸도 마음도 항상 자유롭지 못하게 묶여 있어 마음의 병이 깊어진 연산을 잘 표현해냈다. 생모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와 그의 후궁들에 대한 원망을 마음속에 품고, 밖으로 표현해 내지 못하는 감정들을 폭력적인 모습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연산의 감정이 잘 나타났다. 그런 연산은 광대 ‘공길’을 만나 자신의 감정을 되돌아보는 생동감있는 캐릭터로 다시 태어났다.
‘녹수’역의 강성연은 ‘연산’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 사랑을 더욱 갈구하고, 때로는 표독스럽지만 때로는 모성애를 통해 그를 위로하는 녹수의 모습을 잘 표현해 냈다. 또한 영화 <왕의 남자>를 통해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신예 이준기가 있다. <호텔 비너스> 등의 작품을 통해 일본에서 먼저 인기를 얻은 이준기는 중성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는 광대 ‘공길’역을 맡았다. ‘장생’과 함께 광대놀이를 하지만 궁궐에 들어가서 연산을 만난 후 그가 가진 고독과 아픔을 감싸안아 연산을 위로하려는 공길의 감정을 아주 잘 연기했다.
어린 땐 광대들 하는 짓에 눈이 멀고,
광대짓을 할 때는 어느 놈이랑 짝맞춰 노는 것에 눈이 멀고,
한양에 와서는 구경꾼들이 던져주는 돈에 눈이 멀고,
어쩌다가 궁에와서는 이렇게 눈이 머니,
어느 잡놈이 그 놈 마음 훔쳐가는거 못보고
<왕의 남자>는 초반에는 저잣거리를 중심으로 후반에는 궁궐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양한 장소를 영화속에서 보여줬는데, 특히 광대들이 궁궐에서 왕과 중신들 앞에서 광대놀이를 벌이는 무대는 정치적인 음모가 벌어지는 비극적이지만 화려한 광대놀이가 펼쳐지는 장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공간의 필요성을 느낀 제작진은 매번 공연이 촬영 될 때마다 연회장 세트를 새롭게 꾸며 영화의 흐름이 점점 화려해졌다.
세트뿐 아니라 <왕의 남자> 제작진들은 의상에도 각별한 정성을 들였다. 초반의 저잣거리 장면에서는 백성들의 소박한 자연주의 의상을 선보였고, 궁궐에서 펼쳐지는 장면에서는 단아하지만 한편으로는 화려한 궁중의상을 통해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특히 궁중에서 펼쳐지는 연회의 광대놀이에서는 ‘종이의상’을 선보였는데, 이 ‘종이의상’은 중국에서 경극 공연 때 실제 사용되던 옷이다. 영화속에서는 광대들이 경극 공연을 할 때 한국적으로 변형해 촬영에 사용되었다. 배우들은 한 벌 뿐인 종이 의상이 상할 까봐 신경을 쓰면서 연기를 해야 했고, 제작진들도 종이의상이 땀에 젖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황제의 사랑이 크고 크지만
그 사랑을 원하는 이 또한 많구나
황제가 내게 친히 보약을 내리시니
내 어찌 받지 않으리요..
영화 <왕의 남자>는 초반에는 광대들의 신명나는 광대놀이가 저잣거리에서 펼쳐지며 관객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준다. 무대를 궁궐로 옮겨서도 광대들은 잠깐 궁궐과 왕의 권위에 눌려 머뭇거리지만 금세 자신들의 흥을 되찾아 신명난 놀이를 펼친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관객들은 재미보다 더 깊은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지만 저잣거리의 광대보다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왕의 고독과 아픔, 그리고 그런 그를 인간적으로 연민했던 가장 낮은 위치의 광대의 이야기가 관객들의 마음을 울릴 것이다. 징한놈의 이 세상 한판 신나게 놀고 가면 그 뿐. 광대로 다시 만나 제대로 한번 맞춰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