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나무를 베어라
Pruning The Grapevine, 2006

- 신에게로 향하며
영화는 느리고 침착하다. 정적이며 카메라 쇼트도 크게 움직임이 없다. 예술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별로 추천할 만한 영화는 아닐지도 모른다. 큰 사건도 없고 복선, 플롯도 뚜렷하지 않다. 마치 어느 신부의 수필을 읽듯 차분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야기는 결코 얕지 않다. 깊은 물이 고요하듯 그 정적인 순간마다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한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무엇 때문에 그곳에 갔을까 등등.
줄거리에 나와 있는 것처럼 영화는 카톨릭교의 신학대학생인 수현의 삶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에게 바치기로 했다. 남자이길 포기하고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는 길, 즉 신부가 되기로 결정한 인물이다. 하지만 신부의 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욕망과 늘 싸워 이겨야 하며 세상을 등져야 한다. 그의 신분에서 바쁜 일상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바빠도 오직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일에 집중되어야 하며, 세상의 관심거리는 배척해야 하는 입장이다.
언젠가 TV에서 신부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매일 같은 패턴으로 성당에서 자신의 할 일을 하며 기도를 드리고 고해성사를 받는다. 그리고 그것을 또 신께 기도를 올리고 용서를 구한다. 남의 죄를 대신 받아 주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는 모르겠지만 매일 타인의 죄를 듣는 그들의 입장은 결코 행복할 것 같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평생 자신의 삶을 신에게 바친다는 명목하에 가장 중요한 이성간의 교류를 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서글퍼보였다.
마침, 인터뷰 중 누군가 그들에게 결혼하지 않으며 사는 삶이 어떠냐고 물었었다. 그에 대한 답은 확실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긍정의 미소였든 씁쓸한 회안의 미소였든, 나는 그 미소는 한 가지로 해석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영화 속에 나오는 수현은 갈등이 많다. 답답한 같은 일상의 생활에서도 나오고 싶고, 몰래 밤에 연 친구의 생일파티처럼 술도 마시고 놀고 싶다. 반대로 그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 엄마는 그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아프다는 거짓말로 수현을 수도원에서 잠시 나오게 했다. 수현은 그런 엄마를 보면서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곳에 있는지 설명을 하지만, 카메라는 그 후에 수현의 고민하는 모습을 더 보여준다.
무엇보다 가장 큰 갈등은 사랑이다. 그는 수도원에 오기 전에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 경험이 있었다. 당시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슈퍼스타가 된 이민정이 맡은 수아라는 여자였다. 이 사랑은 수현의 선택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수현은 또 다른 죄를 얻게 된다.
- 사랑은 누가 준 것이기에
신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신부가 되는 사람들이 왜 결혼을 하지 못하는지 정확하게 알 순 없다. 자료를 찾아보니 신에게 온전히 몸을 바친 고결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도 있으며, 대리자기 때문에 순결해야 한다는 말도 있었다. 더 깊고 이론적인 이유들도 물론 있었다. 또 중세시대 왕들이 수도원으로 향하는 권력을 억제하기 위해 펼친 잘못된 법으로부터 나왔다는 낭설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현재 결혼을 하지 않아야 되며,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수도사가 될 수 없는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
영화에서 가장 큰 갈등의 맥은 여기에 있다. 수현은 수아를 사랑한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 때문에 수아와의 사랑의 끈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가장 큰 상처를 받은 건, 수현 자신이 아닌 수아다. 사실, 냉정하게 둘의 관계에서만 보자면 수현이 선택한 건 매우 이기적인 선택이다.
사랑을 하는 마음은 혼자서 생기는 게 아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것을 서로 허락했기에 둘은 사귀고 사랑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직업적인 선택을 운명이라는 무거운 단어를 사용하며 자신의 길을 가겠다고 갑자기 말해 버리면, 가장 큰 아픔을 지니는 건 여자 쪽일 것이다. 당사자인 수현도 상처를 크게 입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그는 자신의 선택이 신을 향한 더 큰 공의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리 큰 상처는 안 받게 되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 감정을 암시하는 장면이 후반에 나온다. 수아와 비슷하게 생간 안젤리나 수녀가 그의 앞에 등장하는데 그때부터 수현은 마음이 흔들리고 감정이 상하기 시작한다. 이때 수현은 그녀가 수아를 닮은 사람이 아닌, 수아 본인 일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다. 이것은 수현이 자신이 내린 결정만이 공의롭고 자신만이 선을 향해 선택했다고 생각했는데, 수아가 자신을 따라 수녀가 되겠다고 하니 느끼는 이상한 이질감과 신에 대한 배신감도 섞여 있을 것이다.
여튼, 결국 그녀는 수아가 아닌 진짜 안젤리나였고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수현은 이미 너무 늦은 것이다. 그리고 안젤리나는 수현에게 왜 먼저 다가왔는지 설명을 한다. 그것은 수현과 똑같은 상황으로 인한 누군가에게 준 상처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때 수현은 비로소 자신도 수아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고 깨닫는 장면이기도 하다.
영화를 다 보고나서 가장 크게 든 의문은 이거였다. 사랑은 분명 신이 준 가장 큰 선물인데, 왜 그것을 못하게 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잘못된 해석인가 진정 신의 결정인가!
아마 감독도 이것에 대한 의문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제목에 대해선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포도나무는 신을 비유하는 것 같다. 성경에 보면 요한복음 15장에는 포도나무의 비유들이 나오는데 이때 포도나무는 신을 가리키는 단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 구성의 방식
시간의 흐름대로 차분하게 흘러간다. 비슷한 류의 예술영화가 그렇듯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 보다는 천천히 인물의 감정을 따라 카메라도 따라간다. 큰 움직임은 없지만 작은 파동들이 하나씩 모여 크고 깊은 호수를 이룬다. 영화는 의문을 주고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감독의 해답은 들추어 볼 수 있다.
- 이 영화의 한 컷
안젤리나와 수현이 만나는 첫 장면. 호기심. 그는 진짜 안젤리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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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영화를 즐겨 보는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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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sung (파일조 무비스토리 패널) |
| <저작권자 ⓒ 원하는 모든것 파일조 filejo.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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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하느님은 포도나무로 비유된다. 알맹이가 모여 하나의 과실을 이루는 포도는 탐스러운 결정체의 집합이지만 그 알맹이들이 온전할 때 포도는 완전하다. 한편으로 포도는 위태로운 과일인 셈이다. 마치 개개인들이 모여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세상은 완전해질 수 없다. 완전치 못한 세상에서 사는 인간들 역시 그렇다. 인간이 신앙이 가능한 것은 그 때문이다. 무언가에 대한 종속적 갈망, 즉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고뇌하기 때문에 무언가에 의지하고자 하는 방편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현(서장원)은 빌립보서를 모두 외울 정도로 독실한 신학도이다. 하지만 그에겐 말 못할 비밀이 있다. 그는 과거 애인인 수아(이민정)를 잊지 못하고 그녀 주변에서 맴돈다. 그래서 강우(이호영)를 맴도는 소문에 귀 기울이고 그와 연대하길 기대하지만 그는 도통 말이 없다. 그리고 이윽고 학교를 떠나는 강우의 뒷모습은 수현의 출렁이던 마음을 넘치게 하고 한순간 자퇴를 결심하게 하지만 그 역시도 학장의 설득에 보류된다. 종교라는 거대한 진리 안에서 고뇌하는 수현을 통해 인간의 나약한 심성이 간파된다. 신앙이라는 믿음 안에서 탈속적 안식을 찾은 듯 하지만 그 곳에도 인간적 고뇌는 존재하고 절제와 금욕 속에 욕망은 더욱 간절해진다. 거기서 인간과 신의 영역이 충돌한다.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영역을 초월해야 한다고 믿는 수현에게 세속적 욕망의 출몰은 버겁다. 그래서 그는 갈등하고 갈망하며 스스로에 엄격해진다. 이런 수현의 시련에 정답이 되는 대상은 문신부(기주봉)다. 사람들은 문신부에게 기도를 바라고 구원을 갈망한다. 그는 자신의 기도가 효력이 없음을 알면서도 사람들의 간절한 요청에 부응한다. 그는 남 몰래 포도주를 숨겨놓고 마시기도 한다. 더불어 신의 뜻을 빙자한 교구가 노쇠한 수도원을 성지로 개발하려 함에 인간적 신념으로 맞선다. 그는 때로 전지적 시점의 위치를 점하기도 하는데 수련 수사인 정수(성준서)의 밀회를 목격하지만 그에 대해 함구하고 추후에는 그네들의 외도마저 용서한다. 그는 인간의 욕망을 잘 알고 신부인 자신도 결국 인간에 지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가 남몰래 마시는 포도주는 정수가 끌어안는 밀회의 욕망과 다를 바가 없음을. 결국 그는 신부라는 소명의 무게감에 집착하는 것 대신 인간적인 흔들림을 존중한다. 자신이 신부이기 이전에 인간임을, 참아내기 전에 갈망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는 불경한 죄악일지 모르나 사실 인간적인 측면에서 억압된 본질의 은폐이기 때문이다.수현의 고뇌는 수아와 빼닮은 헬레나(이민정)를 통해 깊어지지만 그 심해에서 구원을 발견한다. 헬레나는 수현이 은폐하려 했던 과거를 수면으로 드러내게 함과 동시에 그를 그 고뇌로부터 해방시킨다. 수아의 비극은 수현의 심적 고뇌를 현실적인 슬픔으로 치환시키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해갈될 계기가 된다. 헬레나는 수아의 도플갱어임과 동시에 수현의 페르소나이다. 그녀는 수아와 닮은 외모로 그를 현혹하지만 동시에 수현의 내면이 지닌 고뇌의 무게감을 똑같이 지니고 수현의 고해를 대신한다. 수현은 헬레나의 고백을 통해 자신이 그 속박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인지한다. 헬레나는 수아를, 수현은 수아의 역할을 대신하고 그로 인해 헬레나와 수현은 각자 서로를 대속(代贖)한다. ‘하느님을 모시는 자는 심각해져서는 안 됩니다.’ 신부라는 소명은 신의 대리자이자 신과 인간의 영매적 위치에 서있다. 그들은 인간에게 신의 음성을 대신 한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그것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그 거짓은 믿음을 지닌 자에게 안식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신의 뜻인지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어차피 한낱 인간에 불과하니까. 결국 수현이 베어야 할 포도나무는 신이라는 버거운 상대가 아닌 그 스스로 두려워하는 중압감인 셈이다. 스스로가 버리지 못하는 중압감, 부질없는 인간적 고뇌. 수현은 한 꺼풀 벗겨진 고뇌의 무게 뒤로 자신의 시계가 다시 내일로 돌아감을 인지한다. 포도를 얻기도 전에 포도나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결국 모든 번민과 고뇌는 우리가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짊어져야하는 십자가와 같다. 그 십자가를 내려놓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것은 자신 스스로가 지닌 미련 혹은 욕망의 끈을 놓는 것. 그 포도나무에 열릴 탐스러운 포도를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공을 들여야 한다. 하지만 포도를 얻기도 전에 그 힘겨운 작업을 두려워한다면 포도를 얻을 수 없다. 포도를 얻기 위해서는 그 망상의 포도나무를 베어야 한다. 우리는 미천한 인간이므로 지극히 인간적인 고민을 안고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 그 고뇌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을 인정하면 우린 가벼워질 수 있다. 깃털처럼, 가볍게.
2007년 2월 20일 화요일 | 글_민용준 기자 (kharismania@movi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