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계절
-행복하고 싶은 모든 불청객의 이야기-
어떤 노년을 보내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은 각각 다르겠지만
부부가 함께 정원을 가꾸고 텃밭에서 채소를 일구고 과일나무를 심으며
한가로운 시간마다 지인들을 초대해 함께 식사하는 여유를 꿈꿀 것이다.
여기 그런 부부가 있다. 바로 톰과 제리.
영화 내에서도 누군가가 말하기를 이름만 봐서는 앙숙으로 보인다고 하는데
실은 아주 행복하고 선량한 부부다. 톰은 지질학자로, 제리는 상담가로 일하고 있다.
그들을 찾아오는 친구들은 모두 어딘가 조금 부족하거나, 상처가 많은 자들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챕터가 나뉘어 영화의 흐름이 전개되고 거의 식사장면으로 이루어져 밥 먹는 일 빼고는
아무것도 안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식사에 많이 치중되어 있다. 우리의 생활 중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아무래도 식(食)이지만 실제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식사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 않는데
감독이 그런 부분을 잘 나타내고 싶어한 듯 하다
봄
오프닝은 중년의 여성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여성은 어디가 불편한 지 모르겠지만 혈압과 여러 가지 검사를 하는데 그녀는 계속 수면제를 달라는 말만 한다.
그리고 그녀는 카운슬러 제리에게 상담을 받아도 개인사에 대해 절대 입을 열지 않는다.
제리는 그런 그녀에게 또 찾아오라고 하지만 부담을 주지 않을 테니 마음 내키는 대로 찾아오라고 한다.
제리가 환자를 대하면서 생기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제리에게는 메리라고 하는 날씬하고 예쁜 직장동료가 있다. 메리의 의견으로 메리와 제리는 퇴근 후 한 잔 하게 된다.
하지만 그마저도 남편이 식사준비를 하고 있는 제리는 집으로 가기 전 1시간밖에 시간을 내지 못한다.
제리가 메리에게 어떤 선을 긋고 있는 것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제리가 자리를 뜬 후에도 메리는 잘생긴
신사에게 눈길을 주지만, 그에게 다가온 사람은 자신보다 훨씬 젊고 예쁜 여성이다.
괜한 실망감에 표정이 일그러진 메리.
그런 메리에게 있어 톰과 제리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녀에게 2번의 이혼으로 남겨진 것은 단돈 5천 파운드와
작은 아파트뿐이다. 외로움에 지친 그녀는 제리 부부를 자주 찾아와 공짜 상담을 하곤 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말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제리의 말도 들어주고 싶어 한다. 자신에게 제리부부가 필요하듯,
제리부부에게도 자신이 필요한 사람임을 인정받으려 한다.
그렇지만 제리는 선을 긋듯 메리에게 개인사에 대해 거의 얘기하지 않는다.
마치 첫 장면에서 나온 중년 여성과 제리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듯하다.
여름
빨갛고 작은 자동차를 사고 싶어 하던 메리는 드디어 자동차를 사게 되고 3시간 만에 제리의 집에 도착했지만
스스로 아주 뿌듯해하며 마치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은 듯 지인들에게 속사포로 자신의 새 차에 대해 전달한다.
그러나 메리는 차의 배기량을 비롯해 적당한 가격인지도 모르고 산 듯 보인다.
그런 그녀의 모습 중 아무 조건도 따지지 않지만, 외모만 보는 그녀의 남성상이 비친다.
메리의 그런 남성상을 충족시키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톰과 제리의 아들 조다.
그는 30살의 잘생긴 청년으로 메리와 대화가 잘 통하는 젊은이이다. 하지만 그도 그녀를 그렇게 달가워하는
눈치는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이상형에서는 아주 많이 벗어났지만 그녀에게 아주 호감이 많은 켄이 있다.
켄은 단 둘이 있을 시간을 엿보다 메리와 헤어지기 전에 차안에서 그녀에게 고백하지만, 그녀는 질색하며
그를 매몰차게 거절한다. 메리가 켄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녀의 말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원하기만 한다면 멋진 외모를 가질 수 있을텐데, 10kg 이상은 빼야겠지?”

가을
여느 날처럼 주말 농장에 다녀온 톰과 제리는 반가운 소식을 접하게 된다. 아들 조가 여자친구 케이티를 데리고 온 것.
하지만 제리네 집을 방문한 메리에게는 참으로 기분 나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이차고 뭐고 친한 친구의 아들이고 뭐고 호감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던 남자에게 애인이라니 라는 표정으로
케이티를 노려보는 메리지만, 케이티는 특유의 긍정적이고 사랑스러운 성격으로 대한다.
그러한 메리를 조의 이모뻘로 지칭해주는 톰과 제리. 메리는 그러한 지칭을 거부하고 싶어한다.

겨울
톰과 제리 부부는 톰의 형인 로니가 아내와 사별했다는 소식을 듣고 런던으로 가게 된다.
부부는 상냥하게도 상심한 로니를 위해 식을 함께 보아주고 준비해온 음식들로 고인의 지인분들을 초대해
함께 나누어 먹는다. 하지만 로니의 아들 칼은 이 모든 것이 짜증나고 아버지 로니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늦게 온 주제에 무슨 식이 이렇게 빨리 끝나냐고 화를 내고, 준비한 음식이 아버지가 아닌 작은아버지내외가
준비해왔단 사실이 아버지를 더욱 밉게 만든다. 톰은 그런 칼에게 충고하려 하지만, 제리가 말린다.
그렇게 마음 붙일 곳이 없게 된 로니에게 톰은 자신의 집으로 가서 며칠간 머물라고 제의한다.
로니는 그 제의를 받아들여 잠시 톰부부 집에 머물게 된다.
로니가 머무는 동안 메리는 수척한 몰골로 톰의 집에 방문했지만, 로니 말고는 아무도 없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로니에게 자신을 해명해 톰 부부가 올 때까지 혼자 차를 끓여마시며 기다린다.
하지만 그 날은 아들 조와 그 여자친구 케이티가 오기로 한 날. 가을의 불편한 일이 있는 뒤로 제리는
메리를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다. 그런 메리를 불쌍히 여기며 차마 내쫓지는 못하지만,
자신이 그녀에게 얼마나 실망했는지에 대해 언급하자 메리는 매달리듯 사과한다.
그런 그녀를 받아주어 결국 온가족이 영화 속 마지막 식사를 하게 된다.
모두 즐거운 식사 속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를 한다.
다들 웃고 떠들며 먹는 사이 카메라는 마지막 엔딩컷으로 메리의 울상지은 표정을 잡는다.
그녀는 어디에도 낄 틈이 없는 이 식사자리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영화는 끝이 난다.
*
내가 본 영화에서는 거의 끼리끼리 노는 것처럼 잘 살고 행복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끼리,
못 살고 불행한 이들은 그런 이들끼리 어울리는 걸로 나오는데 이 영화에서는 예외다.
감독이 말하고 싶은 바가 뭘까.
영국 리얼리즘 영화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마이크 리 감독은 보수주의의 허상을 들춰내는 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처음 이 영화를 접할 때, 잔잔한 느낌의 영상과 대사로 따뜻한 영화를 기대했는데,
영화의 엔딩을 접하고 나니 그의 명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톰과 제리는 켄과 메리에게 관용과 너그러움을 보여주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마치 그들은 감정의 부자와 같다. 돈이 많은 부자들은 자선단체나 그들이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지만,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로 재탄생 할 수 있게 함이 아닌, 그저 조그마한 보조이다.
이들 부부도 마찬가지다. 이 상처받은 자들에게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얘기를 들어주거나 식사를
대접해 주는 작은 도움뿐이다. 사실 톰과 제리는 그들의 인생에 개입하기도 싫으며, 그들이 자신의 인생에
개입하기도 싫어하지만, 이 부부는 감정과 사랑이 여유롭게 넘치는 이들이므로 조금은 나누어줘도 괜찮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 이상을 넘기면 아주 차갑게 변한다.
어떻게 보면 희망고문과 같다. 메리와 켄에게는 이제 말동무나 함께 식사할 사람이 아닌 서로 의지하고 기대고
또 자신을 필요로 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필요한 건데, 톰과 제리는 ‘이게 당신과 우리의 선이에요’ 를
늘 말하는 듯 절대 그 이상 다가가지 않는다.
그것이 영화 보는 내내 나를 불편하게 하였다. 마치 보여주기 식의 상냥함. 진심으로 그 사람의 상처를 봐주는
노력은 전혀 하지도 않으면서 이들을 불쌍하게 동정만 하는 그들. 메리와 켄은 자신의 세계에 갇혀 구원해 줄
가족을 기다리지만, 남의 불행에 대해 망설이고 모른척하고 다가가는 척만 하는 이들이야말로 자신들이
정해놓은 행복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버린 건 아닐까.
* *
상처받은 자들이 이 영화를 보게 된다면 오히려 자신의 현실에 더 아파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동전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메리가 될 지 제리가 될 지는 많은 상황들에 따라 바뀐다. 제리가 된다면
상처받은자를 더 이상 희망고문 하지 말고 상처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을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며, 메리가 된다면
내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전전긍긍하며 불청객이 될 지 눈치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나의 인생에 있어 관계를 전반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영화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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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적인 영화보다 잔잔한 깨달음을 주는 영화를 원하시는 분,
삶에 대한 통찰과 다양한 감정들을 경험하고 싶으신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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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최나영 (파일조 무비스토리 패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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