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살면서 누구나 꼭 한번 무언가를 잃어버립니다. 단순히 몇 백원짜리 동전들이나 립밤을 잃어버릴때면,
조금 짜증을 내면서 금방 그것들에 대한 기억들을 잊어버리지만,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때 사람들이 느끼는 상실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커지죠. 기억을 금방 잊기는 커녕, 하루 종일 잃어버린 소중한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게되고, 다른 모든 것들은 제쳐둔 채 어떻게 하면 다시 찾을 수 있는 가를 곰곰히 생각합니다.
만약 단순한 물건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겠죠..
다르덴 형제의 <자전거 탄 소년>는 그러한 최악의 상황에 던져진 한 소년 시릴(토마 도레 분)의 모습을 관찰합니다.
함께 살아오던 아빠는 아무도 모르게 어디론가 이사를 가버렸고, 자기가 가장 아끼는 자전거도 없어진 상태죠.
그런데 이 상황은 더 악화 되어 갑니다.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아빠에게 '다시는 찾아오지마라'는 가장
충격적인 말을 듣고 버림받죠.게다가 동네 문제아인 웨스는 시릴을 이용하려고 까지 하니까요.
그래도 그에 비해 다행인 점도 참 많습니다. 잃어버린 자전거도 사만다 (세실 드 프랑스 분) 덕분에
다시 되찾았고, 사만다의 집에서 같이 살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시릴이 겪는 지옥같은 상황들과 함께 겹쳐지는 일련의 희망적인 부분들은, 시릴이 가진 '인간적인' 조건 때문에
더욱 더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가 충분합니다. 시릴은 아직 일도 없고, 부족함으로 가득찬 '소년'이고,
그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엄마와 아빠라는 부모님, 부모님을 넘어선 가족이 필요한데
시릴의 가족은 이혼과 책임회피를 통해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으니까요. 희망이라는 의미가 주위의
어두움이 진할수록 빛을 발하듯, <자전거 탄 소년>에서의 희망도 점점 주위가 어두워지는 동시에
더욱 밝게 빛날 준비를 할 수 있는 거죠.
이 먹먹한 세계에서 시릴이 가장 많이 의존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자전거입니다. 이미 한번 아빠에게 버림받고,
자전거를 잃어버렸던 시릴은 이제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자전거를 철저하게 지킬려고 합니다. 결국
영화 속에는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어머니의 역할을 '자전거'가 대신 해주고 있는 셈이 되어버린거죠.
시릴이 웨스가 나쁜 성향을 갖고 있는 것을 앎에도 그를 따른 이유는 자신의 자전거를 지켜주고
수리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 것은 시릴이 사만다에게 자청하여 함께 살고싶다는 의사를 나타낸
것에 대한 똑같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허나, 이제 시릴은 자신의 '자전거' 속에 담긴 어머니의 역할을 웨스와 사만다, 둘 중 한 명에게 옮겨야하는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역시나 웨스는 시릴을 자신의 범죄에 이용해먹고 쓸모가 없어지자,
가차없이 시릴을 버리죠. 결국, 시릴은 다시 한번 '버림받음'의 아픔을 겪게 되었지만,
자신을 진정으로 생각해 주는 사람은 바로 사만다 뿐임을 실하게 알게 됩니다.
시릴을 도와주는 사만다라는 여성에 대해서 영화 속에는 구체적인 설명도 없습니다. 그저 다만 시릴이 잃어버린
자전거를 사만다가 직접 되찾아줌으로 인하여 서로를 알게되고, 사만다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계속해서
시릴을 보호해주려고 하고, 그 마음으로부터 시릴을 웨스로부터 거리를 두게 만들죠.
그녀의 이런 '이유없는 관심'에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만다가 과거의 어떤 일과 경험을 겪어서
혹은 다른 이유로 시릴에게 관심을 주든, 결국 사만다는 시릴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진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사만다는 시릴이 겪는 흙탕물같은 세계에서는 거의 유일무이한
희망의 존재로 자리 잡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클라이막스, 시릴은 자신이 철없이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에게 보복을 당합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잠시 혼절할 정도로 엄청난 신체적인 피해를 입지만, 시릴은 다시 일어나 흙을 툭툭 털며 일어납니다.
그리고는 다시 묵묵히 자전거에 오르는 시릴. 이제 시릴은 아무렇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자신의 철없는 행동에
대한 죗값이고 더 나은 삶을 위한 과정이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 집에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영화 속 시릴과 사만다의 이야기를 다르덴 형제는 역동적이지않고 그저 천천히 움직이는 카메라를 통해 그저 묵묵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자전거 탄 소년>을 볼 때 더욱 더 사실적으로 와닿는 이유는 카메라의 느린 움직임과
사실적인 색채 묘사가 그 한 몫을 제대로 해내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길을 걷다 부랑자를 보면 잠시 걸음을 늦추듯,
카메라 역시 새로운 현실을 순전히 '보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여린 마음으로 그들을 쳐다보는 것이겠죠,
그리고 영화가 끝났을 때, 우리는 더 이상의 시릴같이 상처받는 사람들을 방관하여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사만다와 같이 물리적이고 동시에 감정적인 손길이 필요한 것이죠.
그 행동의 시작은 바로 보는 이들, 바로 여러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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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소중함을 알고싶은 사람 모두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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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시네박 (파일조 무비스토리 패널) |
| <저작권자 ⓒ 원하는 모든것 파일조 filejo.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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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찾는 소년이 있다. 이 열한 살 소년 시릴(토마 도레)은 보육원에 산다. 보육원에 살지만 아버지가 있다. 한 달만 참으라던 아버지는 행방이 묘연하다. 소년은 미용실 주인인 위탁모 사만다(세실 드 프랑스)의 도움으로 자전거와 아버지를 함께 찾기 시작한다. 소년은 좀처럼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소년이 자전거를 끝끝내 찾아 헤매는 것은 곧 상실한 부정(父情)을 확인하고픈 욕구다. 어린이가 부모에게 부정 당한다는 것은 곧 세상이 끝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소년은 피하고 싶은 현실을 마주한 순간 자해와 동시에 자기 존재를 부정한다.다르덴 형제는 곧 노동 계급 혹은 빈민자의 형제이기도 하다. 거칠고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는 취약한 인물들은 곧 그들의 이야기가 된다. 그런 면에서 전 세계 노동자의 아버지 켄 로치가 스치기도 한다. 투쟁과 노동이라는 이야기를 쟁점으로 다루는 켄 로치와는 달리 다르덴 형제의 인물들은 내적으로 투쟁하고 카메라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다르덴 형제는 매번 주인공들을 관찰한다. 이들은 보통 곤혹스러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감독은 거친 환경 속에 놓여있는 인물들을 핸드헬드로 집요하게 쫓아간다. <프로메제>의 소년은 불법 이민 브로커 아버지가 죽음으로 내몬 이민자와 어려운 약속을 하고, <로제타>는 불법해고를 당한다. <아들>, <더 차일드>, <로나의 침묵>에 와서는 문제가 한겹 더 내밀한 개인의 세계로 넘어온다. 아들을 죽인 소년과 동행해야 하는 남자, 원하지 않는 아이를 갖게 된 십대 부부가 부모가 되어가는 처절한 과정, 계약결혼 속에서 피어난 사랑, 이렇게 관계의 복합성에 윤리를 대입시킨다. 곤란한 상황 속에서 인간됨을 회복하는 것, 다르덴 형제의 희망은 어렵고 고단하다. <자전거 탄 소년>은 다르덴 형제의 필모그래피 가운데서 가장 단단한 희망을 노래한다. 이들의 작품에 귀 기울였던 관객이라면 가장 친절한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주로 비전문배우들을 기용해왔던 감독이 이번 작품에서는 벨기에의 국민 배우 세실 드 프랑스에게 주효한 구원자 역할으 부여한 것, 소년이 감정적인 마침표와 쉼표를 찍는 지점에서 음악이 등장한다는 것 이 두 가지 면에서도 조심스러운 변화가 발견된다. 극중 네 번 의미심장하게 울려 퍼지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는 소년의 감정 변화를 기승전결로 엮는다. 영화는 변함없이 녹록치 않은 소년의 시련을 다루지만 본격적인 희망이 머뭇거리지 않고 들어선다. 가느다랗게 내비치던 구원이 이번만큼은 사만다라는 인물을 통해 눈앞에서 구체화됐다. 그런 의미에서 <자전거 탄 소년>은 다르덴 형제가 들려주는 현대식 이상적인 동화로도 읽힌다. 버림받은 소년에게 거짓말 같은 구원을 부여하는 사만다의 사랑은 엄혹한 세상 속에서 더욱 빛난다. 삼키고 또 삼키다 마침내 파열시키는 소리에 집중하던 다르덴 형제의 영화적 힘에 매혹된 이들에게 이번 영화의 친절함이 낯설거나 과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진화 혹은 변화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2012년 1월 18일 수요일 | 글_양현주 (siwoorain@movi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