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분위기의 뱀파이어 영화
<트와일라잇>의 열풍을 필두로 위험한 로맨스와 화려한 액션으로 치장한 뱀파이어 영화, 미드들이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다 보니 관객들은 어떤 작품이 ‘뱀파이어’를 다룬다고 하면 으레 기대하는 게 생기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인간과 뱀파이어 사이의 금지된 사랑이나 뱀파이어 세계의 피 튀기는 전쟁이 선사하는 액션과 특수효과, 뱀파이어로 인한 인간세상의 혼란과 투쟁 등.
하지만 짐 자무쉬는 이 영화를 통해 기존 뱀파이어 영화나 미드들의 뻔한 스토리와 연출을 따르지 않으며 뱀파이어 영화계의 신 장르를 개척해냈다. 기존의 진부한 뱀파이어 소재 작품들을 거부하듯 애초에 영화에서는 ‘뱀파이어’라는 단어가 한번도 언급되지 않으며, 뱀파이어의 입장에서 느끼는 감각들과 그들의 실제적이고 사적인 생활을 중심으로 영화를 구성했다. 또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음울한 분위기와 스타일리시함을 극단까지 가져간 듯한 어둡고 혼란스런 공간 연출과 비인간적인 배우들의 비주얼, 별세계의 우울한 몽환을 담아낸 음악이 영화에 독특한 매력을 부각해준다.
수 백 년 혹은 수 천 년을 살아온 뱀파이어인 아담, 이브는 각각 미국 디트로이트와 모로코 탕헤르에 떨어져 사는 부부다. 세상을 등지고 버려진 아파트에 숨어서 미지의 인물로서 곡을 발표하는 뮤지션 아담은 현재의 인간 세상에 혐오를 느끼며, 빈티지 기타나 잡동사니를 인간 친구 이안에게서 수집하곤 한다. 그는 지루하게 이어지는 삶을 더 이상 지속하기 힘들었는지 어느 날 이안에게 자살용 총알을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한편 이브는 탕헤르에서 오랜 뱀파이어 친구인 크리스토퍼 말로우와 그 제자에게 신선한 피를 공급받으며 오래된 책들에 둘러 쌓여 거주 중이다. 하루는 아담과 영상 통화를 하다 그가 우울해하는 것을 보고는 디트로이트로 날아간다. 이브는 아담을 만나 자살을 결심한 마음을 돌려놓고, 두 연인은 춤을 추고 체스를 두기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이브의 동생 에바가 나타나면서 약간의 소란이 일어나게 된다.
비현실적 존재들의 현실적 일상
이 영화의 플롯이란 이렇게도 단순하며 뚜렷한 기승전결 없이 다소 산발적이다. 영화를 보면서 클라이막스 같은 장면이라고 해 봤자 맨날 집에서만 뒹굴던 아담과 이브가 에바때문에 밖으로 끌려나가 근처 바에서 음악을 듣고, 에바가 술통에 든 피를 경솔하게 마시는 등 아슬아슬한 행동을 하는 것 정도다. 흔히 뱀파이어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뱀파이어를 우상화하며 금기시된 사랑이나 종족 내 다툼과 같은 드라마틱한 모험을 그리곤 하는데, 이 영화에선 뱀파이어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나 매력적인 모험담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보다는 뱀파이어라는 비현실적인 존재의 현실적인 일상을 그냥 흘러가듯 보여주려는 시도가 느껴진다.
영화 속 그들은 해가 뜨면 잠을 자고 해가 지면 일과를 시작하는데, 아담 같은 경우는 음악을 만들고 이브는 책을 읽기도 한다. 어떤 날엔 집의 전기가 나가서 직접 고치기도 하고, 불청객의 방문에 불쾌해 하기도 하며, 막대를 꽂아서 얼린 피를 아이스크림 마냥 먹기도 한다. 웬만하면 밖으로 나다니지 않지만 때로는 함께 드라이브를 나서서 컴컴한 도시를 배회하기도 한다. 이들은 오밤중에도 선글라스를 즐겨 착용하는데 인간에게는 어둔 밤이 뱀파이어에게는 햇빛 찬란한 한낮과 같다는 재치있는 설정이다.
뱀파이어 감각 체험
이런 뱀파이어의 평소 삶의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신기하게도 시간이 매우 천천히 흘러가는 느낌을 받는다. 등장 뱀파이어들이 어둠 속에서 나른하게 늘어져서 대책 없는 느린 속도로 별 목적 있는 행동을 하지 않고, 그 주변에 일어나는 평범한(?) 일들을 화려한 움직임 없는 잔잔한 슬로 모션 테이크로 쫓아 다니고, 최면을 거는 듯 몽롱하고 우울한 음악이 영화 전반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하루살이 벌레의 하루가 얼마나 빨리 지나갈지를 생각해보면 수 백 년 혹은 수 천 년을 살아왔을 뱀파이어의 하루는 얼마나 천천히 흐르는 듯 느껴질지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언급한 영화적 요소들을 통해 뱀파이어가 느낄 법한 답답하리만치 더딘 시간의 흐름을 인간인 우리가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해준다.
또한 뱀파이어들만이 느낄 특수한 감각들, 염세주의와 인간에 대한 경멸, 우울과 불안도 여기에 더해져 우리에게 전달된다.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의 목에서 미개하게 피를 빨아대지 않는다. 작은 와인 잔에 순수한 피를 정성스레 담은 뒤 그 피가 입안에서 목을 타고 몸 안으로 천천히 번져나가는 희열을 음미한다. 마치 절정의 쾌감이 전신을 훑고 가는 듯한 혹은 미식가가 세상에 다시 없을 진미의 첫 술을 떠 입 안 가득 녹이며 황홀해 하는 듯한 표정으로.
이런 그들만의 감각 말고 또 주목할 점은 오래 살아온 만큼 빛나는 그들의 지성과 교양이다. 여기 등장하는 뱀파이어들은 위대한 문호와 과학자, 음악가들로서 활동하거나 그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인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해온 모양인지라 영화 속에는 역사가 기억하는 유명인의 이름이나 초상, 그들의 작품과 이론이 대거 등장하고, 덕분에 뱀파이어의 지적 놀음판에 어느새 끼어들게 된다. 특히 크리스토퍼 말로우는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에 활동한 16세기의 극작가로 젊은 날 요절한 인물이다. 일설에는 말로우가 정치적인 공작으로 인해 죽음을 위장하고 이후에 셰익스피어로서 활동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는 이를 사실로 가정하며 뱀파이어인 크리스토퍼 말로우가 또한 셰익스피어라고 말한다.
한편 아담은 슈베르트에게 현악 5중주의 일부를 줬었고, 직접 우주의 전기적 정보를 에너지로 전환하는 기계장치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브도 각종 언어로 쓰인 책들을 섭렵하고 아담과 양자역학과 아인슈타인 물리학을 넘나드는 대화를 나눈다. 이렇게 몇 세기를 살며 축적한 지식과 교양으로 인해 현학적이기까지 한 뱀파이어들이다 보니 인간들이 뭣 모르고 욕망에 눈멀어 저지르는 파괴적인 행동이나 그들이 뱀파이어에 대해 갖는 두려움과 멋대로 만들어 낸 환상에 질려하게 된다.
우울증에 빠진 뱀파이어
특히 이런 인간에 대한 경멸과 염세적인 경향은 다소 긍정적이고 삶을 즐기려고 하는 이브보다는 아담에게서 강하게 느껴진다. 어떻게 보면 인간에 대한 그의 모멸감은 부러움이나 질투의 반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햇빛 아래 드러난 반짝이는 풍경 속에서 좋아하는 음식을 마음껏 먹기도 하고, 유한한 삶인 만큼 작은 성취에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고, 그만큼 덜 지루한 인간의 삶이 얄밉고 부러운 게 아닐까. 그렇게 경멸하는 인간들의 삶처럼 자신의 삶도 유한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사실 명성, 부, 사랑, 교양과 지식 등 세상에서 얻을 수 있을 만한 달콤한 과실을 질릴 정도로 먹어 봤음에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을 어둠속에 죽은 듯 숨어서 계속 이어가야만 하는 뱀파이어의 운명은, 존재의 의미에 대해 사색하길 좋아하는 어느 예민한 감성에는 견디기 쉽지 않은 것이다. 아담은 자살계획이 이브에게 발각되자 인간들이 지겨워서 그렇다고 토로하는데, 대단하지도 않은 멍청한 인간들 때문에 죽을 필요가 무언가. 그는 그냥 뱀파이어로서 피할 수 없는 지루한 삶을 끝내고픈 것뿐이다.
이렇게 뱀파이어들이 평소 느낄 시간의 흐름이나 특수한 감각, 지나친 지성으로 인한 권태와 인간 세상에 대한 멸시, 우울과 자살충동, 순수한 혈액의 확보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겪는 위험과 불안 등은 그들의 일상을 통해 감각적이고 고상한 화법으로 전해지며 인간인 우리가 뱀파이어의 삶의 면면에 흠뻑 취하게 만든다.
살아남는 자 오직 연인뿐
'Love alters not with his brief hours and weeks,
But bears it out even to the edge of doom.
If this be error and upon me proved,
I never writ, nor no man ever loved.' –세익스피어, 소네트 116
‘시간이 흐른다 해도 변치 않으며 종말까지 살아남는 것이 사랑이니. 이것이 틀렸다면 나는 글을 쓴 적도, 진정으로 사랑한 적 있는 사람도 없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소네트 116에서 사랑의 진리와 불변성을 노래한다. 아담이 느끼는 뱀파이어의 절망적일 정도로 기나긴 삶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으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줄 사람은 연인 이브이다. 그녀는 자살을 결심한 아담 앞에서 음악을 틀고 춤을 추면서 미소 짓게 하고 다시 한번 살아갈 마음을 불어넣어 준다. 영화 첫 장면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레코드 판과 지금도 팽창하고 있을 우주에 서로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듯 그 영원의 굴레 속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뱀파이어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살면서 겪는 날 선 고통이나 삶의 허무감에 스러지지 않고 견디어 언젠가 찾아올 죽음 전까지 살게 만드는 것 역시 진실한 사랑을 주고 받는 사람의 존재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리켜 흔히 ‘내 반쪽’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이들은 원래는 하나였던 것마냥 서로를 더욱 온전하게 해주거나, 서로가 없으면 그 공허함으로 인해서 살아가지 못할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리움이라는 인력으로 언젠가 만나게 될 나의 진정한 반쪽이 빙글 빙글 돌아가는 지구 어디엔가 원거리 유령 작용을 하며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반쪽들이 서로 만나게 되면 종말까지도 살아남을 한 쌍의 연인이 늘어나는 셈이다. 그 사랑하는 연인의 손을 꼭 맞잡고 뱀파이어 조차 감탄할 인간의 아름다운 자취들에 도취된 채 명멸하는 밤을 두려움 없이 건너자. 불변의 사랑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불멸의 아담과 이브가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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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분위기의 뱀파이어 영화를 감상하고 싶은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