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유는 간단하다. 비밀 요원이라는 설정 하나만으로 스크린에 가시화할 비주얼과 내용이 풍성해지기 때문. 관객들은 ‘비밀 요원’이라는 단어에서 기막힌 액션 장면을 기대하게 된다. 그리고 뭔가 특별해 보이는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 믿는다. 여기에 반전만 있다면 금상첨화. 그렇게 상업 영화 제작자들은 이 ‘비밀 요원’이라는 직업 설정 하나만으로 무수한 영화들을 제작해 그럭저럭 손해를 보지 않을 만큼의 돈 벌이를 해왔다. 요원들이, 소비됐다.
<테이큰>, <나이트 폴> 등의 영화가 ‘요원’의 직업적 매력을 전면에 내세워 큰 재미를 본 영화라면 한국 스타일의 ‘요원’ 영화라 할 수 있는 <은밀하게 위대하게>, <동창생>, <용의자>등은 요원의 역량을 극대화해 주인공을 ‘살인병기’로 만드는 데 주력했다. 전자가 액션을 기본으로 주인공이 조직 내에서 터득한 기술들을 시연하는데도 눈길을 주었다면, 후자는 주인공의 액션 하나로만 승부를 본 셈이다. 어떤 전략이 더 나은지를 명확히 따질 수는 없겠으나 아무래도 볼거리가 많은 것은 전자 쪽이다.
할리우드는 영화 <하드데이>를 통해 다시 한 번 요원을 영화에 써먹었다. 전략은 전자의 영화들과 동일하다. 기본 얼개가 비슷한 <테이큰>과 약간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딸도 사건에 적극 개입하고, 이를 풀어나가는 조력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 정도이다. 설정의 유사성을 약간은 피해갈 요량으로 나름 독창적인 상황을 설정한 듯한데, 결과적으로 영화는 제대로 꼬여 버렸다. 영화가 의도한 부성애의 정서를 공감하기 전에 영화의 내용 파악이 힘들어 몰입이 깨져버렸다. 이 영화, 무엇이 문제였을까?
주인공 벤 로건(아론 에크하트 분)은 전직 CIA요원이었으며, 현재는 ‘할게이트’라는 기업에서 보안시스템을 개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다닌 회사가 통째로 사라진다. 업무상 주고받았던 이메일 내용, 급여통장의 입출금 내역 등 그가 회사에 다닌 기록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영문도 모른 채 하룻밤에 백수가 돼버린 벤 로건. 이제 그에게 남은 건 딸 에이미(라이아나 리버라토 분)뿐이다. 모든 상황을 함께 맞닥뜨린 부녀는 일순간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고, 정체 모를 상대는 계속 이들의 목숨을 위협한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에이미는 난생 처음 보는 벤의 모습에 놀라고, 벤은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는 에이미에게 자신이 전직 CIA요원이었으며 미국 국적을 박탈당한 국외자임을 밝힌다. 강제로 거대한 음모에 개입된 부녀는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고 그 과정에서 에이미는 상대로부터 납치를 당하고 만다. 벤은 딸을 구하기 위해 상대와 마지막 접선을 시도한다.
초반은 흥미롭다. 무엇보다 스피디한 상황 전개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도통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인물들의 움직임이 빠른 만큼 그걸 따라가느라 지루할 틈은 없다. 화려하지 않지만 봐줄 만한 액션 장면이 펼쳐지는데, 특히 초반에는 총보다 몸으로 싸워 박진감은 배가 된다. 그 사이 부녀의 서먹한 관계를 짐작할 만한 에피소드도 놓인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정확히 말하면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이 하나둘씩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부터다.
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회사가 사라진 이유다. 그래서 벤은 그 이유를 추적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제거하려는 세력들을 만난다. 이때부터 상황이 복잡하게 전개된다. 게다가 영화는 이러한 상황을 요목조목 설명해주지 않는다. 시종일관 숨기고 꼬기만 한다. 내용 파악이 난해할 수밖에 없다.
물론 영화가 일일이 사건을 설명하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의 단서는 제공해야 했어야 했다. 관객이 상황을 파악하고 내용을 해석할 수 있게 판은 깔아줬어야 했다. 감독은 ‘숨은 그림 찾기’같은 스릴러를 만들고자 했는지 모르겠으나 이 영화는 찾을 그림 자체가 없어 보이는 것이 문제다. 그림을 찾고자 하는 관객의 의지를 꺾어버리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우스운 것은 관객뿐만 아니라 영화 안의 주인공들도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난감해 하는 것이다. 모든 상황이 의심스럽고 두려운 에이미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벤에게 이것저것 묻는데 벤은 에이미의 질문을 거부한다. 자신도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질문 거부의 이유다. 결말에 가서야 상황 파악을 끝낸 벤은 그제야 영화가 던진 첫 미션, 에이미 구하기에 몰입한다. 하지만 관객은 이런 벤의 행동에 몰입하지 못한다. 결말에 닿기 전까지 집중력이 흩뜨려진 탓이다.
결국 <하드데이>가 실패한 스릴러로 전락한 이유는 기본 설정의 개연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CIA와 할게이트가 어떤 연유로 해당 사건에 짬짜미를 한 것인지, 안나가 벤을 이 사건에 끌어들인 진의는 무엇인지, 사건의 배후는 정확히 누구인지 등. 영화가 반드시 설명해야 할 부분에 전혀 공을 들이지 않고 있어 <하드데이>는 스릴러 냄새만 풍기는 가짜 스릴러가 되고 말았다. 더구나 이런 상황을 풀어가는 방식도 관습적인 연출법에 기대고 있어 흥미를 느낄 수 가 없다. 예를 들면 벤이 안나와 접선을 시도하는 장면이 그렇다. 지하철 플랫폼에서 안나의 일행을 떨구려는 벤의 묘수는 묘수라 부르기에 민망할 만큼 많은 영화에서 반복된 장면이다.
마냥 감춰 둔다고 스릴러가 아니다. 풀어줄 때는 슬슬 풀어주고 조일 때는 조이면서 긴장감을 조성했어야 했는데 <하드데이>는 이를 영리하게 조절하지 못했다. 괜히 단서를 숨기고 복잡한 상황을 더 복잡하게만 만들어 뒷맛을 씁쓸하게 만들어버렸다. 결국 영화의 결론은 아주 관습적으로 두 부녀가 서로의 안위를 확인하며 끝난다. 애끓는 부성애도, 화려한 액션도, 흥미로운 사건 해결도 없는 스릴러에 관객의 눈은 감긴다. 예상보다 긴장감 없는 스릴러에 아쉬움은 남지만 개인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개개인에게 다른 느낌을 선사할 것이다. 직접 만나보는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