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엄 아워스
Museum Hours, 2012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특유의 고요한 분위기에서 작품과 내가 오롯이 대면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전시 되어 있는 작품들 사이를 천천히 오가고 그 안에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며 평화롭게 유영하는 것은 박물관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작은 사치이다.
<뮤지엄 아워스>는 오스트리아 빈의 미술사 박물관(쿤스티스토리셰)를 배경으로 박물관에서만 가능한 이 고유의 경험들을 영화의 화폭에 그대로 옮겨 내었다. 나아가 일상을 흡사 박물관에서 작품을 바라보는 듯한 새로운 시각으로 음미하게 만든다. 젬 코엔은 독립영화 감독답게 장르를 넘나드는 실험적인 화법을 과감하게 사용하며 이를 능수능란하게 전달하고 있다. 관객을 박물관으로 초대해 그 곳에서만의 경험과 시선을 선사하는 이 영화를 자세히 만나보자.

낯선 땅이 신기한 여자, 익숙한 도시의 새로운 모습을 보는 남자
미국에 사는 앤은 오스트리아 빈의 병원에서 사촌이 혼수상태가 되어 누워있다는 연락을 받고는, 연고자가 없는 사촌 곁을 지켜주고자 빈으로 향한다. 일단 낯선 도시를 둘러보기 위해 그녀는 빈의 미술사 박물관으로 향하는데, 그곳에서 미술관 안내인 요한에게 병원으로 가는 길을 물으며 얼굴을 익히게 된다. 요한은 왜인지 모르게 앤에게 눈길이 가게 되고, 그녀의 사연을 듣고는 뮤지엄 패스를 구해주거나 병원에 전화를 걸어주는 등 호의를 베푼다. 이것을 계기로 둘은 미술관은 물론 빈의 곳곳을 함께 돌아다니며 대화를 나누고, 사촌을 방문하기도 하며 우정을 쌓아가게 된다.
이방인의 눈으로 생경한 도시와 그곳의 삶을 신기해하면서 들여다 보는 여자, 그리고 오랫동안 살아온 도시를 여자에게 구경시켜주면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남자. 둘은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도시를 누비지만, 평범해 보였던 것들에서 새로움과 특별함을 발견하는 시선을 얻었다는 점에서 같다. 그런 시선의 공유 때문일까? 물에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서서히 번져나가다가 완전히 섞이어 하나가 되는 것처럼, 국적, 성별, 살아온 배경과 직업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침착하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게 된다.
사실 둘 사이에 로맨스가 있었다면 전달하려는 주제가 흐려지고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도 여성에게는 관심이 없는 요한 때문에, 이야기는 외지에서 만난 두 남녀의 통속적인 로맨스로 발전하지 않는 대신 이후 등장하는 피터 브뤼겔의 그림 같은 보편적인 인간애를 획득하며, 익숙한 일상에 대한 신선한 시각과 새로운 발견이라는 테마에 집중하게 한다.

박물관은 영화를 타고
앤과 요한이 영화 속에서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장소는 빈 ‘미술사 박물관’이다. 영화는 박물관을 방문한 관람객들이 겪는 경험과 감각을 영화 속에서 재현한다. 박물관에 가면 우선 폐쇄적인 공간과 멈춘 시간 속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는 작품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관람객들은 이 특유의 공간과 시간 감각 속에서 자신 안에 잠자고 있던 고요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서 평소의 빠른 발걸음을 늦추고, 박물관의 그림들, 조각들을 유심히 살펴보며 빠져드는 기회를 얻는다.
감독은 박물관에 있는 사람들의 정지된 듯한 모습을 담고, 작품들을 클로즈업과 좀 더 멀리서 찍은 샷으로 번갈아 포착하면서 이런 박물관에서의 고요와 몰입을 영화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박물관을 벗어난 곳에서도 이 경험의 연장을 시도한다. 예를 들어 도시 속 사람들을 느린 흐름으로 가만히 응시하는가 하면, 박물관에서 작품을 보는 우리의 시선처럼 빈 곳곳의 풍경을 클로즈업한다. 또 박물관의 그림 속에서 보았던 어느 풍경이나 사소한 요소와 닮은 부분을 바깥의 세상에서도 찾아낸다.

한편 박물관에서는 보통 시각과 청각이 불일치를 이루게 되는데 이 점도 박물관 밖에서 표현된다. 박물관에서 작품을 보고 있을 때는 주변의 웅성거림이나 옆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 작품 해설기의 해설은 귀로 들려오지만 시선은 그림이나 작품을 향하기 때문에 청각은 시선이 비추고 있는 장면에서 발원하지 않는다.
감독은 이것이 인상 깊었는지, 빈의 풍경이나 주인공들을 담을 때도 이런 불일치가 나타나게 한다. 예컨대 요한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요한이 아닌 앤만 화면에 담거나, 앤이 병원 안으로 이동할 때 요한과 앤이 박물관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들리는 식이다.

벼룩시장이 선 한 거리를 담은 숏에서는 박물관의 작품 해설기에서 흘러나오는 사자의 서에 대한 설명이 겹쳐지기도 한다. 이 숏을 보면 현재 진행중인 우리 모두의 삶도 언젠가는 낡고 오래되어 박물관 한쪽에 전시되고, 그에 대한 해설이 녹음기에서 흘러나올 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결국 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박물관이고,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삶과 풍경들은 그대로 하나의 작품인 셈이다.
박물관 안에서 일어나는 감각과 경험들을 박물관 밖에서도 적용시키려는 이런 다양한 시도들은 관객들이 복잡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삶의 쳇바퀴를 잠시 멈추고 스쳐 지나가게 놔뒀던 일상을 붙잡아 들여다게끔 돕는다. 또 먼 과거에는 분명히 실재했던 사람들의 흔적이 이제는 박물관 어느 벽에만 걸려있는 것처럼, 우리의 현재도 언젠가 그렇게 된다는 영리한 암시를 통해 인생의 무상함과 그 만큼 더 소중히 여겨야 할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피터 브뤼겔의 영화적 환생
박물관에서 작품을 바라보듯 우리 삶도 주의 깊게 들여다보라는 이 메시지는 피터 브뤼겔에 대한 큐레이터의 설명이 나오는 장면을 거치면서 ‘모든 일상적인 삶과 모든 무명의 존재들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과 관심’을 가지라는 것으로 한층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발전한다.
16세기 네덜란드령 플랑드르에서 활동했던 화가 브뤼겔은 ‘인간’이라는 테마를 그리면서도 당시의 전통적인 초상화, 역사화, 종교화나 르네상스 미술의 영향에서 벗어난 독특한 화풍과 색채감, 웅장한 풍경 속 다채로운 인간 군중의 모습을 녹여낸 구성미로 유명하다.

브뤼겔은 부자나 유명인이 아닌 평범한 서민들의 각기 다른 모습을 위트가 담긴 시선으로 그림 안에 세세하게 담아 놓았다. 영화 속 큐레이터의 설명처럼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림에서 조차 그리스도 보다는 그 주변 수백 명의 평범한 사람들을 일일이 조명하며 이런 사소한 일상들이 종교적 대사건과 같은 중요도를 가지는 것처럼 그리기도 했다. 혹자는 이를 위대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눈앞의 일에만 정신이 팔린 인간의 어리석음을 풍자한다고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보다는 다른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것 같다. 즉 브뤼겔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판단을 내리거나 감상에 젖지 않으면서 그에 대한 애정과 존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런 브뤼겔의 관점을 계승하면서, 그가 현재에도 살아있다면 물감대신 카메라를 가지고 무엇을 담아냈을지 보여주려는 것처럼 어디에나 있을 빈 곳곳의 평범한 사람들과 소소한 풍경들을 화면에 담는다. 브뤼겔의 그림이 영화의 미장센을 통해 현대에 와서 재탄생 하는 것이다. 우선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브뤼겔 그림 속 평범한 사람들처럼 주인공부터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배우들이며 나머지 인물들도 박물관에 온 관람객이거나 빈에 사는 범상한 사람들이다.

또 브뤼겔이 그림에서 저 멀리의 풍경과 사람들까지 상세하게 그려놓은 것처럼 영화는 화면의 저 먼 끝까지 포커스가 맞도록 빈의 풍경을 넓고 깊게 찍는다. 마치 모든 사소한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가치가 있다는 듯 말이다. 한 숏에서는 미술관 벽에 걸린 많은 수의 초상화를 보여주다가 빈의 허름한 선술집 벽에 붙어있는 사진들-술집에 방문한 사람들이 찍혀있는 기념 사진들-을 이어서 보여준다. 이렇게 브뤼겔의 시선으로 우리네 모습을 바라보며 관객은, 그의 그림이 아름다운 만큼이나 현실 속 평범한 인간 군상과 그들의 일상적인 삶도 아름다우며 그 그림이나 우리의 일상적 삶이나 근본적으로는 같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림 속 사람들이 이제는 죽고 없듯이 우리 삶의 모습도 언젠가는 완전히 쇠퇴하여 사라져 버리겠지만 이런 세상의 덧없음 덕분에 현재 이곳에서 일어나는 삶과 풍경은 그 자체로 유물이며 대체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가치를 얻는다. 먼 미래의 인류는 언젠가 현재 인류의 평범한 삶을 담은 영상을 박물관에 전시해놓고 놀라워하거나 감동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영화는 그러니 우리의 평범하고 지루한 무명인의 삶을 브뤼겔처럼 호기심 어린 눈과 애정과 존중을 가지고 자세히 보면서 감동해 보라고 한다. 매일 지나는 어떤 거리를 구성하는 부분들과 그 집합의 조화로움,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누군가의 뒷모습에서 문득 스치는 그리움, 짙은 밤 가로등 조명 아래 드러난 하얀 눈의 춤사위, 어느 건물 벽 한쪽에 찍힌 다른 건물의 화석 같은 자취, 일하고, 꾸물거리고, 놀고, 춤추고, 웃으며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는 생의 반짝임에.
실험적 시도들의 유기적 연결
영화에 집중하여 빠져들다 보면 어느 순간 앤과 요한을 잊게 된다. 어쨌든 이야기는 진행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무시하듯 영화는 언뜻 스토리랑은 상관없어 보이는 거리 풍경들을 그림처럼 때로는 사진처럼 보여준다. 그리고 피터 브뤼겔에 대해 설명하는 큐레이터나 선술집에서 춤추는 사람들이 나오는 장면 등은 거의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또 영화 마지막에는 장편영화의 정형화된 화면에서 벗어나 필름으로 찍은 듯한 저해상도의 영상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렇게 그림, 사진, 비디오, 영화, 다큐멘터리를 넘나 드는 실험적 시도들이 사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박물관에서 어느 실내의 구석에 빛이 살짝 비치는 그림이 클로즈업으로 나오는 와중에 앤은 무에서 무로 돌아가는 것 같다는 감상을 말하는데, 이 장면은 나중에 앤과 요한이 방문한 동굴 모퉁이에서 빛이 사라지는 장면과 이어지고, 이것은 다시 사촌의 용태 변화와 연결된다.
그리고는 박물관에서 죽은 이의 무덤을 방어하는 기능을 했던 이집트 유물을 보여준 뒤, 이민자의 삶을 위로하는 선술집의 파티를 담아내는 식이다. 중구난방으로 보였던 영화의 실험적인 구성들은 하나의 큰 주제적 맥락과 이야기 속에서 이렇듯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완성되어 나가는 것이다.

영화를 본 후 관객은 박물관에서의 경험이 비주류적 영화 화법을 통해서 현실에서 살아나는 것을 느끼고, 나아가 걸작의 요소를 잉태하고 있을지도 모를 우리의 평범하고 무상한 일상을 애정과 관심어린 시선으로 새롭게 바라보며 그 진가를 제대로 인식하게 된다. 특히 요한이 박물관에서 작품 설명을 하듯 빈의 평범한 거리를 담은 영상을 진지하게 설명하는 마지막 부분은 이런 영화의 의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얼굴을 알아볼만한 배우가 등장하거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감독이 찍은 영화는 아니지만 기교나 허세를 부리지 않는 영민한 실험정신을 발휘하여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선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이 영화는 가히 수작이라 불릴 만하다. 당대에는 가난하게 살다 생을 마감한 화가들의 작품이 오늘날에 와서 가치를 인정받고 감동을 주는 것처럼, 이 영화 또한 오랜 세월 속에서도 살아남아 언젠가 재조명 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