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Clouds of Sils Maria , 2014
20년 후의 시그리드
한 편의 연극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 여배우 ‘마리아’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자신을 톱스타로 만들어준 연극의 리메이크 버전에 출연 제의를 받는다. 당시 맡았던 젊고 매력적인 소녀 ‘시그리드’역은 마리아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게다가 마리아는 속편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당연히 ‘20년 후의 시그리드’를 상상한다. 그러나 감독이 제안한 역은 ‘시그리드’가 아니라 그녀에게 이용당하는 연상의 상사 ‘헬레나’역이었다.
“나는 영원히 시그리드로 남고 싶어요.”
마리아에게 있어 시그리드는 그저 하나의 배역이 아니었다. 무명이었던 그녀를 톱스타로 만들어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그리드는 마리아의 인생 그 자체였다. 마리아는 항상 시그리드처럼 살아왔고, 스스로도 그녀와 같다고 생각했다. 반면 헬레나는 마리아에게 있어 진부하고 한심한 여자였다. 나이도 많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고, 결국에는 모든 걸 잃어버린 채 쓸쓸히 죽어가는 여자. 과거 헬레나 역을 맡았던 배우 ‘수잔’은 1년 후 자살하기까지 했다. 일련의 모든 과정을 지켜봤던 마리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시그리드였던 당신만이 헬레나를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새로운 감독 ‘클라우스’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시그리드였던 마리아만이 헬레나를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새로운 시그리드 역에는 헐리웃의 트러블레이커, 떠오르는 신예 ‘조앤’이 캐스팅된다. 조앤은 과거의 마리아처럼 젊고 아름다우며 자신감으로 충만하다. 헐리웃의 문제아를 자청하며 각종 스캔들을 몰고 다니는 조앤. 마리아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는 기분을 느끼고 두려워한다. 하지만 극중 마리아의 매니저인 ‘발렌틴’은 단언한다. 과거의 마리아에게도 그런 잔인성과 폭력성이 존재했다고. 그것을 당신만 모르고 있다고.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다
시간의 흐름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자신감과 무모함으로 충만했던 과거의 시그리드는 이제, 자신이 경멸하고 무시했던 헬레나가 되어 그녀의 입장을 헤아리기에 이르렀다. 극중 마리아는 이 같은 현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녀가 헬레나를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오히려 그녀의 매니저인 ‘발렌틴’이 헬레나를 변호하며 마리아를 설득하려고 애쓴다. 사실 극중 마리아가 질투하는 대상은 새로운 시그리드 조앤보다는, 자신에게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는 발렌틴일 것이다. 발렌틴은 젊음과 아름다움은 물론, 과거의 마리아가 가질 수 없었던 자유분방함 또한 갖고 있다. 그건 조앤의 대책 없는 무모함과는 또 다른 성숙함이다.
반면 마리아는 더딘 성장을 한다. 그녀의 의식은 아직 20대 시절의 화려함에 머물러 있다. 그녀의 성장은 열여덟 살의 시그리드에 머물러 있다. 마리아는 정신적인 성숙과 그에 따른 책임을 무서워하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더 많은 것을 받아들여야 되고, 소화하지 못한 잔여물이 속에 남아 크게 앓는다. 하지만 호되게 앓고 난 후에는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깨달음을 얻는다. 젊음이나 아름다움 따위로는 얻을 수 없는 궁극적인 무엇.
각 세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개봉 전부터 ‘호화 캐스팅’으로 화제가 되었다. 줄리엣 비노쉬, 크리스틴 스튜어트, 그리고 클로이 모레츠. 각 세대를 대표한다고 일컬어지는 여배우들의 명연기가 돋보인다. 최근 <까미유 끌로델>에서 연륜이 묻어나는 연기를 선보인 줄리엣 비노쉬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도 그 저력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끈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시크하고 내추럴한 분위기의 발렌틴을 훌륭하게 연기했다. <렛 미 인> <킥 애스>등의 작품으로 크게 알려진 클로이 모레츠 역시 헐리웃의 악동 조앤 역에 잘 어울렸다. 세 여배우의 활약으로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은막의 빛을 발했다.
세월 앞에 빛나는 아름다움
전성기(일명 리즈 시절)을 가뿐히 뛰어넘고도 여전히 빛나는 배우들이 있다. 극중 마리아를 연기한 줄리엣 비노쉬 역시, 젊은 시절 우수 어린 눈빛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스타다. 그 우아하고 기품 있는 분위기는 세월 앞에서도 바라지 않았다. 물론 젊음과 생기는 한번 지나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 어떤 것보다 큰 재산이 젊음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청춘이 삶의 가장 큰 이유라는, 그것이 전부라는 말도 있다. 극중 마리아가 느끼는 괴리감은 잃어버린 젊음에 대한 욕망 그 자체였다. 과거의 자신은 이미 스스로가 아니라는. 분노하는 그녀의 눈빛에서는 <은교>의 이적요가 연상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에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전성기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고,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허물을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허나 그 과정은 결코 잃어버리는 것만이 아니다. 잃어버린 것 대신 무언가를 분명히 얻을 수 있다. 마치 등가교환처럼.
사람은 과거를 그리워해서는 안 된다. 그건 스스로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일이며, 현재를 기준으로 마이너스밖에 되지 않는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대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현재’가 나중의 과거가 된다. 나는 마리아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과거의 시그리드가 아니라 현재의 헬레나로서. 힘겹게 껍질을 벗고 탈피한 그녀가, 보다 훨씬 아름다운 뱀으로 완성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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