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원
Poppoya , 鐵道員: ぽっぽや , 1999

철도원은 수십 년간 호로마이 역을 지키는 역장으로 살아온 사토 오토마쓰의 인생사를 담담한 어조로 담아내고 있는 수작이다. 아사다 지로의 철도원이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만큼 탄탄한 전개를 보여준다. 영화 속 호로마이 역장으로 분한 배우는 2014년 11월 타계한 일본의 국민배우-우리나라로 치면 최불암이나 이순재 선생님이라고 볼수 있는-다카쿠라 켄이며, 그 외에도 당시 영화계에서 신선한 분위기와 얼굴로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던 히로스에 료코가 함께하고 있다.
영화 각본과 배우들의 연기는 물론이고 설원의 아름다운 풍광과 그에 조화로운 OST는 관객이 스토리에 몰입하게 하는 힘을 실어준다.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은 다카쿠라 켄을 페르소나로 내세워 철도원외에도 17편의 영화를 함께 찍었는데, 호타루, 당신에게 등 다양한 수상경력에 빛나는 영화들을 만들었다.

철도와 분리될 수 없는 삶
영화는 그림 같은 풍경 속 첩첩산중을 뚫고 웅장하리만치 검고 긴 열차가 내달리며 시작한다. 희뿌연 연기를 하늘위로 흩날리고 자부심에 찬 경적소리를 내면서. 열차의 끊임없는 왕복 속에, 주인공 사토 오토마쓰는 여인 시즈에를 만나고, 결혼을 하고, 열차 기관사에서 호로마이 역장으로 승진해간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며 원래의 열차는 어느 순간 붉은색 한 칸만 달랑 남은 아담한 열차로 변한다. 영화의 시작은 이렇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철도와 오토의 삶이 함께 늙어가는지를 주마등 스치듯 담아낸다. 호로마이가 탄광마을로 융성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을 실어 나르며 번영했던 노선은, 이제는 적자를 면치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여 곧 폐선을 앞두고 있다. 은퇴를 앞두고 갈 곳 없는 오토는 이 철도와 꼭 닮아있어 마치 운명공동체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이 오토란 인물은, 그저 평범한 시골 역장은 아니다. 정년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주름 깊은 노인이면서도, 손님이 있든 없든 눈이 오든 비가 오든 간에 호로마이 역에서 매일같이 신호를 확인하고 기차의 앞뒤를 점검하는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철도원이다. 막차를 보내지 않으면 술 한잔도 기울이지 않고, 아픈 딸, 아픈 아내를 병원에 보내놓고도 교대를 해줄 사람이 없으면 끝까지 역에 남는다. 자신의 사사로운 일상이나 감정보다 철도원의 일을 우선하며 살다 보니 그는 딸과 아내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다. 그리고 은퇴 후 리조트에서 같이 일하자고 제안하는 철도원 친구 센에게도 자신은 철도 일만 해왔기 때문에 다른 일은 할 수 없다며 한사코 거절한다.

“아니 대체 왜?”
이런 꽉 막힌 오토를 보며 관객들은 이내 복장이 터져 묻게 된다. 부인 시즈에와 친구 센, 센의 아내가 그랬듯, “도대체 왜 철도원의 일이 딸이나 아내보다 중요한가? 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이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가?”하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관객은 이 고집불통 주인공에게 던지는 물음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찾아간다. 사람들은 살면서 자신이 가진 직업이 요구하는 역할이나 가장, 남편, 아버지로서의 역할 등 다양한 역할에 직면한다. 몸은 하나이기에 결국 우선순위를 정하게 되는데, 오토의 경우 투철한 직업정신과 책임감으로 소문난 만큼, 또한 철도원이었던 자신의 아버지의 업과 가르침을 제대로 잇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인 만큼, 그 최우선 순위에 철도원으로서의 역할을 두게 된다.

그 역할이 오토의 삶을 이끌어 가게 되는데, 잠시 주목할 것은 오토의 삶의 공간과 업무공간이 제대로 분리가 되어있지 않다는 점이다. 작은 역사 한 켠을 집 삼아 거주하다 보니 철도원으로서 사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하루 일과를 마치더라도 그 책임감을 어깨에서 내려놓기가 힘들어진다.
이렇게 자기 정체성의 대부분을 철도원으로 정의하며 살아온 오토가 갑자기 다른 무언가가 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오토는 철도원 외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서툴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철도일 외에는 쓸모가 없다고 자신을 평가하는 오토는 철도를 떠난 새로운 삶이 그저 ”두렵다”.
한편 관객은 철도원이란 직업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 오토가 치른 대가를 목격한다. 외로움과 눈물, 행복과 웃음을 참아야 했고, 표현할 길 없이 사랑했던 딸과 아내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까지 안고 있다. 이쯤 되면 영화 초반에 눈 덮인 고요한 호로마이 역을 홀로 지키는 듬직한 거산 같았던 오토를 보는 우리의 시선도 달라진다.
언제나 우리를 지켜줄 것 같던 아버지의 커다란 어깨가 어느 순간 늙고 지친 작은 어깨로 느껴지듯, 자신이 선택한 철도원으로서의 삶을 위해 개인적인 삶을 대가로 지불해야 했던 오토의 쓸쓸한 뒷모습을 문득 느끼고는 연민과 안타까운 마음을 담은 시선으로 지켜보게 된다.
“오토는 철도원인거야”
아내 시즈에는 임종을 앞두고서, 일 때문에 어김없이 병원에 도착하지 못하는 오토의 소식을 듣고는 그는 그렇게나 철도원인거야. 라며 옅은 미소를 짓는다. 오래 전, 갓난 딸을 병원으로 데려가는 시즈에의 눈에 어려있던 남편에 대한 원망은 어느새 잔잔한 미소로 변했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말고는 살아가는 방법을 몰랐던 무뚝뚝하고 고지식한 남편을 이제는 그저 받아들이고 사랑한다는 듯이.
마음 넓은 관객들이라면 시즈에처럼 어느 순간 비난과 불만은 접어두고 오토는 그냥 철도원말고 다른 삶을 살 수 없는 사람이다하고 수용해 버리게 될 것이다. 영화가 담담하게 보여주는 오토의 삶을 통해 그에 대해 느꼈던 초반의 답답함과 의문은 이렇듯 점차 그에 대한 이해와 연민으로 바뀌어 간다.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교차 속에서 나타난 세 명의 소녀
영화의 구성적인 특징이라고 한다면, 현재와 과거가 끊임없이 교차 편집 된다는 점이다. 이는 등장인물들이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들이 많아 언제고 추억이 되살아나는 나이든 사람이라서 이기도 하고, 또 그들이 스쳐간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채울 길이 없어 계속해서 떠올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렇게 시도 때도 없는 과거와 현재의 조우 속에서 어느 날 할아버지를 만나러 왔다며 붉은 목도리를 한 꼬마아이가 역에 나타난다. 손에는 낡은 인형을 들고 때묻지 않은 순수로 오토를 미소 짓게 한다. 또 얼마 후엔 인형을 찾으러 왔다며 그보다 조금 더 큰 아이가 나타나 뽀뽀를 하고 도망치고, 마지막엔 그 아이들의 언니라며 고등학생 소녀가 나타나 오토에게 따스한 찌개를 끓여준다.

이 마지막 소녀로 분한 배우는 당시 19살이었던 히로스에 료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히로스에 료코가 철도원 모자를 쓴 채 경례하고 있는 스틸컷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영화 속 히로스에 료코의 등장은 늦고도 짧은 감이 있지만 눈같이 깨끗한 얼굴로 발랄한 사랑스러움을 발산하는 그녀는 검게 그을린 석탄 재 같은 영화 분위기를 단번에 전환시키는 존재감을 보여준다. 소녀가 어디서 온 누구인지는 영화를 통해 확인하자.
이 소녀와의 대화를 들어보면 오토가 자신이 아픈 딸과 아내의 곁을 지켜주지 못했던 것을 계속해서 후회해왔다는 점이 드러난다. 몇 백 번의 후회일지라도 과거가 바뀌지는 않으니 사실 아무 소용이 없는데도 말이다. 소녀의 등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오토가 채울 수 없는 그리움과 멈출 수 없는 후회 속에서 살아왔으며 그가 얼마나 과거에 사라져갔던 것들이 현재에도 존재하길 원했는지를 상징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명백한 용서를 받지 못한 채 후회 속에서 살아온 오토에게 과거가 전하는 마지막 선물일수도 있겠다.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에 바치는 장송곡
이 영화는 흘러가는 시간, 변해가는 상황에 따라 언젠가 스러져갈 우리 모두의 모습을 담고 있다. 한때 번성했지만 지금은 폐선을 앞둔 호로마이 라인과 은퇴를 앞두고 있는 백발의 오토. 탄광으로 많은 수입을 거둬들였지만 탄광 폐쇄 이후로 기울어가는 마을과 늙어버린 청춘들. 이들처럼 언젠가 모든 존재는 필멸의 운명 속으로 사라져 오직 기억 속에서만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그 과거를 기억하는 누군가 조차 사라질 때는 비로소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소음을 흡수하는 설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인 만큼 OST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특히 영화 처음에 오토가 역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증명서를 비춰주는 장면에서부터 나왔던 웅장한 OST는 영화의 마지막까지 함께한다. 당당하고 자부심 넘치는 걸음걸이로 나아가야 할 것만 같은 이 음악의 분위기는 점차 기억에서만 떠올리게 될 모든 것들에 대한 존중과 위로를 보내는 듯 하다.
살다 보면 나 외의 모든 존재들이 하나 둘 스러지는 장면을 가슴 아파하며 지켜보게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소녀가 이야기 했듯 우리에겐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남아있는 아름답고 행복한 추억이 있다. 여전히 살아갈 나날이 있다면 우리는 그 추억을 안고 내 마지막 열차 출발의 날까지 씩씩하게 산 자의 사명을 계속해야 한다. 끊임없이 펼쳐진 레일을 따라 언제나 거침없이 힘차게 나아가는 기차처럼 말이다.. 아니다. 때로는 깔려있는 레일도 돌아올 간이역도 없는 게 인생인 만큼 우리는 기차보다도 더 씩씩하게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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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 특유의 잔잔한 분위기와 고즈넉한 풍경을 사랑하는 사람
마음 속에 먹먹한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
히로스에 료코의 풋풋한 모습을 보기 위해서 짧은 등장 분량도 감내하겠다는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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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소로우 (파일조 무비스토리 패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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