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카피하다
Copie Conforme , Certified Copy , 2010
1990년대 세계 영화계의 화두는 이란 영화였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라는 작가의 등장과 함께 근 10년동안 이란영화는 전 세계 영화제 곳곳에 소개되고 찬사 받고 영화관객들에게 수많은 질문 거리를 던져주었다. 비록 상업적 성공을 거두진 못했을지라도 1990년대 이란 영화가 이룩한 영화 미학적, 비평적 성취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2000년대 내내 디지털 영화에 많은 관심을 쏟아 붓던 키아로스타미가 오랜만에 장편 극영화로 관객들을 찾아왔다. 이란 바깥에서 촬영된 첫 장편영화. 프랑스 여배우 줄리엣 비노쉬와 영국의 대배우 윌리엄 쉬멜이 주연을 맡은 ‘사랑을 카피하다’가 바로 그 영화이다.
이 영화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올리브나무사이로’, ‘그리고 삶은 계속되다’의 지그재그 3부작에서 널리 보아온 이란의 풍경이 아닌 이탈리아 투스카니 지역의 풍경이 펼쳐지는 영화다.
‘사랑을 카피하다’는 ‘기막힌 복제품’이라는 예술의 원본과 복제품에 관한 책을 쓴 작가 제임스 밀러와 그의 팬으로 책 강연회에 참석했다 작가와 만나게 되는 프랑스 여인 사이의 하루가 채 안 되는 만남 동안 이어지는 대화와 그들 사이의 소통이 주 된 내용이다. 마치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시리즈’ 속 두 남녀가 15년 쯤 후에 만나 벌이는 대화 같이 영화는 낯모르는 두 중년 남녀의 대화를 물끄러미 엿들으며 이탈리아 지방소도시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좋은 복제품이 원본보다 훌륭하다는 생각을 가진 작가 제임스 밀러와 원본 자체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프랑스 여인 사이의 의견 차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수다가 영화에서 흘러나온다. 서로의 견해 차이에서 예민해지던 프랑스 여인은 카페 주인과 이야기하던 중 작가를 자신의 남편인양 말하게 되고 제임스 역시 이 낯선 상황극에 빠져 그녀의 남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둘은 15년 된 중년 부부 연기를 한다.
프랑스 여인은 흔히 여자들이 남편에게 기대하는 것들, 다정한 손길, 애정 어린 미소와 관심 같은 것이 결여된 차가운 남편의 태도에 대해 끊임없이 잘못을 지적하고 제임스 역시 남편의 입장을 대변하며 여자의 지적에 맞서 항변한다. 이렇게 두 중년 남녀는 아내와 남편의 역할극에 자연스레 동참한다. 과연 이 두 남녀는 정말 부부였으나 모르는 척 하고 있었던 것일까? 낯선 사람이었으나 서로의 부부 연기에 빠져 자신들의 역할에 열중하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모호하게 설정된 두 중년 남녀의 관계는 원복과 복제품의 관계처럼 현실의 사랑과 복제된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어느 것이 원본(진짜)이고 어느 것이 복제품(가짜)란 말인가! 모나리자마저 현실의 여자 모델을 복제한 것에 불과하다는 제임스의 말처럼 그들의 관계는 어떤 현실을 복제하고 있는 것인가?
혹은 그들 사이의 15년 전의 과거를 끊임없이 떠올리며 그 때를 돌이켜보려는 여자의 태도는 원본을 보여주려는 의지인가? 혹은 원본에 의미부여하고자 하는 노력인가?
‘사랑을 카피하다’는 두 남녀사이의 모호하고 추상적인 관계를 통해 예술의 원본과 복제품에 관한 담론을 지나 영화와 현실의 관계에 대해서까지 은유하고 있는 영화다. 두 남녀사이가 실제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결말은 관객의 몫이다.
무엇이 진짜인지에 대한 생각을 잠시 덮어 두고 영화가 들려주는 여러 이야기와 담론, 영화가 보여주는 서정적이며 평화로운 이탈리아의 풍경들에 마음을 맡겨보자. 적당한 호흡과 리듬으로 흘러가는 영상과 대화에 집중하다 보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어떤 울림이 느껴질 것이다.
이 영화에서 줄리에 비노쉬는 힘들게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사는 중년 여성을 연기했다. 그녀의 좀 정신없는 것 같은 몸짓과 말투가 참 인상적인데 줄리엣 비노쉬는 이 영화로 깐느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어, 불어, 이탈리아어 3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영화를 이끌어가는 그녀의 연기에서 애잔함이 느껴진다.
또한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을 맡은 영국배우 윌리엄 쉬멜의 지적인 연기 역시 인상적이다. 언뜻 보아도 느껴지는 지적인 풍모와 우아한 태도가 중년 남자배우의 매력을 물씬 풍긴다. 두 배우의 섬세한 연기만으로도 오래도록 인상에 남을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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