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녀, 칼의 기억
Memories of the Sword , 2014
이 영화 <협녀, 칼의 기억>을 두고 <와호장룡>이나 <영웅>, <일대종사> 등의 무협 영화를 많이들 떠올렸을 것이다. 그런 연상의 배경에는 꽃잎인지 눈발인지 온 세상을 덮을 듯 흩날리는 장면과 느리고 느리게 공기를 가르는 칼날의 시퍼런 서슬, 그리고 무협인들의 복수와 울분에 찬 일합들이 그대로 겹쳐지기 때문이다.
성룡의 코믹 쿵후나 이연걸의 <황비홍>과 같은 파괴력을 주로 하는 액션 외에 ‘무협’은 인생사를 담아내야 하고 인물의 감정선이 적과의 대결구도에서 만들어져야하기 때문에 무협 영화는 액션을 쉽게 담을 수 없는, 장인 정신이 있어야 하는 장르이다.
그래서 영화는 달빛 아래에서, 꽃잎 흩어지는 절정의 봄날에, 혹은 시리게 파란 달이 뜨고 무거운 구름이 낮게 깔린 묵직한 하늘 아래에서 천천히 칼을 겨누고 차갑게 식은 땀이 흐르는 얼굴들이 느리게 느리게 화면을 채우게 된다. 그런 무협 영화의 전형적인 장면들 속에서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구슬픈 사연을 담고서 이 한 맺힌 인물들의 인연과 악연을 들여다보게 하는데, 반전 아닌 반전, 반전 같은 반전이 영화의 심도를 짙게 한다.
그래서 <협녀, 칼의 기억>은 끝날 때까지 이야기가 어디까지 흘러갈 지, 주인공 홍이가 어떤 선택을 할지 꼼짝없이 느리면서 빠르게, 멈춘 듯 하면서 흘러가듯 지켜보게 하는 2시간의 관람 시간을 꽉 차게 한다.
유백(이병헌)이 개최한 무술 대회에 나가 율(준호)와 겨루게 된 홍이(김고은). 작은 동네에서 말괄량이로 지내는 홍이가 흥미로운 무술 대회에 나간 것은 일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홍이의 무술식을 눈여겨보던 유백은 홍이를 쫓아가 누구에게 무술을 배웠는지 묻는다.
여기까지 초반의 장면들을 쫓아와 보면 유백과 홍이의 관계는 그리 무관한 관계가 아니라는 점, 무술의 장르가 쿵후처럼 태극권, 장권, 남권, 영춘권 등 장르와 계파의 분류로 전통적이라는 점 등으로 무협의 기본 장르를 잘 따르고 있다. 무술 품새만 보고도 어떤 파인지 알아보는 것은 무협 영화의 기본일 터 홍이의 무술은 유백과 이어져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한편 홍이의 어머니 월소(전도연)은 기구한 사연을 홍이에게 들려주며 앞으로 일어날 슬픈 결말을 예견한다. 예전 젊은 시절, 시대를 주름잡던 3인의 실력자 덕기, 설랑, 풍천은 대의를 위해 함께 힘을 합하여 난세를 정의로 지켜나가지만 권세의 욕망을 이기지 못한 덕기의 배신으로 풍천이 죽고 만다.
그리고 덕기는 조정으로 나아가 지금의 유백이 되었고 중앙 관리로 진출하려는 야욕을 계속해서 부풀리며 살아왔는데 설랑은 눈이 먼 채로 월소가 되어 홍이와 살게 된 것. 홍이는 풍천의 딸이지만 월소는 자신의 딸처럼 홍이를 키워왔던 것인데, 이제 홍이를 집 밖으로 떠나보내며 다음에 만날 땐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는 언질을 남기며 인연을 끊는다.
기구한 운명으로 엮어진 이 세 사람 유백, 월소, 홍이는 과연 슬픈 사연으로 복수와 원한으로만 뭉쳐진 악연들일까. 아직 세상을 짊어지기엔 어린 홍이에게 유백과 월소의 사연은 과연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할까.
<협녀, 칼의 기억>은 단순하면서 복잡하게 엮여진 이들의 사연을 천천히 되짚어보고 또다른 시선으로도 접근해가면서 인간사의 욕망과 순수했던 마음과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순간들을 슬로우로 보여주면서 세월의 흐름을 바람처럼 불게도 한다.
충무로의 핫한 배우 세사람 이병헌, 전도연, 김고은이 무협 영화의 주인공들로 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화제작일 수 밖에 없는 이 영화는 섬세한 장면들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감정과 피할 수 없는 혈연의 끈끈한 정을 맨얼굴로 마주하게 한다. 전도연의 맑은 눈빛과 화장기 없는 맨얼굴은 그래서 위 세사람들 중에서 단연 깊은 인상을 남긴다.
<무뢰한>에서 짙은 화장으로 술값을 받으러 다니는 마담처럼 현대극에서 특히 훨훨 살아 숨쉬는 전도연이 고전 무협극에서도 이렇게 섬세하게 감정선을 타면서 거친 칼솜씨를 보인다는 것은 그녀의 관록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는 장면들이다.
물론 이병헌의 묵직한 활극은 극을 안정시키고 깊이 있는 목소리는 유백의 고뇌와 출세를 하고자 하는 뜨거운 욕망의 깊은 속내를 그대로 잘 전달해준다.
<터미네이터>의 T-1000처럼 살기 어린 로봇도, <지. 아이. 조>의 스톰 쉐도우의 기계화된 용병도 이병헌의 마스크는 모두 잘 어울리는데 고전적으로 자란 수염으로 덮인 유백의 얼굴은 <협녀, 칼의 기억>이 갖고 있는 무게감에 중심을 잡아주는 축으로 작용한다. 유백의 이병헌은 잘 캐스팅된 예로 훌륭하다.
그리고 그리 길지 않은 커리어를 갖고 있으면서 뜨거운 충무로의 뜨거운 감자 같은 배우 김고은. <은교>, <차이나타운>, <몬스터> 등 그녀의 작품은 일정 패턴을 예상하기 어렵게 그녀를 잡아두지 못한다. 오히려 흔하게 보이는 페이스가 단점같지만 <몬스터>의 약간 모자란 복순이나 <차이나타운>의 한마리 짐승 같은 일영에서 보듯이 그녀의 눈빛은 그 영화에서 그대로 살아나 지금도 그 곳에 있을 것만 같은 생명력을 지닌다.
홍이가 자신의 출신을 제대로 알고, 자신의 혈연과 관계를 인식했을 때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선택하는 기로에서 보여주는 결연한 의지와 결말로 치닫는 순간까지의 일직선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유백과 월소의 사연을 뛰어넘는 의지를 보여준다. 김고은이 보여준 홍이의 모습은 그렇게 울부짖다가 또는 단호하게 마음을 다잡다가 하는 내면의 경과를 쨍쨍 부딪치는 칼날 속에서 버무려진다. 지금까지는 극단적인 배역만 맡아 보여주었는데 앞으로 그녀의 진솔한, 지금 나이에 딱 맞는 배역을 보고 싶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컴퓨터 모니터나 스마트폰 화면으로 보기 보다는 대화면 TV로 보길 권한다. 극장의 큰 화면에서 보면 딱 좋겠지만, 이제 다운로드로 보여지게 될 테니 그나마 좀더 큰 화면으로 보게 되면 슬로우로 돌아가는 화면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인물들의 감정선과, 삶과 죽음을 가르는 칼날의 울음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맨 위에 언급한 <와호장룡>, <일대종사>, <영웅>과 같은 선상에서 그 느낌을 오랜만에 간직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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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C-Guy (파일조 무비스토리 패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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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녀, 칼의 기억>은 현재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세 명의 배우를 한 자리에 모았다는 점, 한국에서 보기 드문 무협영화라는 점에서 일단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같은 요소에서 비롯된 흥미는 영화의 미덕이 아닌 아쉬움으로 남는다. 중력을 거스르는 경공술 장면은 매끄럽지 못하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눈에 익은 장면들로 설계된 액션신은 영화의 기대치에 못 미친다. 사실 <협녀, 칼의 기억>은 무협의 세계보다는 주인공들의 뒤얽힌 애증과 운명에 더욱 집중한다. 멜로에 방점을 둔 무협영화인 셈이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인어 공주>를 통해 빼어난 멜로 감성을 담아냈던 박흥식 감독의 연출의 묘가 다시금 기대되는 대목이다. 허나 영화는 홍이의 성장, 월소와 유백의 사랑, 유백의 야망 등 너무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느라 중심을 잃는다. 그 어느 인물 하나 설득력있게 빚어내지 못하고 공감을 잃는다. 제작비의 규모를 가늠케하는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영상과 배우들의 명불허전 연기는 찰나의 매력을 발산하지만 영화 전체를 구제하기엔 부족하다.
2015년 8월 6일 목요일 | 글_최정인 기자 ( jeongin@movist.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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