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영화관
Chacun Son Cinema , To Each His Cinema , 2007

올해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통해 2016 아카데미 시상식 감독상을 수여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차이나타운", "피아니스트"라는 불후의 명작을 만들어낸 비운의 천재 로만 폴란스키, 극단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다운 작품 세계를 구현하는 라스 폰 트리에, 그외에도 코엔 형제...구스 반 산트...장예모...데이비드 린치...데이빗 크로넨버그...
그외에도 수많은 명감독들 이 영화라는 매체를 설명할 때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 위대한 거장들이 한 자리에 모이다니 도대체 무슨 일인가, 처음 이 영화의 감독진 리스트를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도대체 어떠한 이유로 이 거장들이 이 하나의 영화를 만들게 된걸까.

이 영화 "그들 각자의 영화관"은 칸 영화제 탄생 60주년을 기념하여 칸 영화제의 조직위원장 질 자콥이 직접 제작과 편집을 맡고, 지금까지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35명의 감독이 각자 영화관(館)하면 어떤 느낌이 떠오르는지를 주제로 제작한 초특급 옴니버스 영화이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는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관은 어떤 감독의 영화관일까, 하고 추측하는 것도 이 영화의 큰 재미 중 하나이다.테오도로스 앙겔로플로스 감독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아낸 어느 야외 상영관에서 시작되는 영화는 그 후 수많은 감독들이 보여주는 세계로 시점이 이동된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단편들을 위주로 써보겠다.
야외 상영관을 담아내는 카메라는 3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 만들어낸 아주 조용한 일본 시골 영화관으로 옮겨간다. 관객은 한 명 밖에 없고 영사기도 자꾸 고장나지만 그래도 그의 영화관은 잔잔한 웃음을 자아낸다. 그 후 몇몇 감독들의 영화관을 비춘 후 카메라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만들어낸 영화관에 도착한다. 그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여자는 맹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눈이 멀쩡한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느낀다.

그 후 영화는 데이비드 린치가 선사하는 초현실적인 영화관을 보여준다. 아주 큰 가위, 소름끼치는 가위 소리, 그리고 기이한 춤을 추는 무용수, 그리고 비명 소리, 역시 데이비드 린치라는 감독 다운 영화이다. 또 몇몇 감독들의 영화관을 보여준 후 우리는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관을 보게 된다. 많은 분들이 라스 폰 트리에의 단편(라스 폰 트리에가 직접 출연한다.)을 베스트로 뽑았는데, 필자도 동의하는 바이다. 정말 섬뜩하고 동시에 통쾌했던 단편. 그리고 이런 단편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낼 수 있는 라스 폰 트리에라는 인물이란!
또한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관 (에로 영화를 보여주는)이 선사하는 이야기는 관객의 뒷통수를 탁! 하고 때리는 재밌는 반전이 존재한다. 그리고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신선하게도 영화가 죄악인 미래를 그려내고 있는데, 이 영화 참 웃기면서도 씁쓸하다. 최후의 영화관 주인이 자살하는 모습을 생중계하는 TV프로그램이라니, 정말 끔찍하다.

이렇게 영화는 한때 우리 같은 관객이었던 이들이 구현한 이 아름다운(몇몇개는 안좋았지만) 영화관들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이미 명감독의 반열에 올랐고 누군가는 명감독의 반열에 오르고 있는 중이지만, 확실히 명감독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작품들도 존재 한다.
그러나 이런 거장 감독들 35명을 3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빠르게 만날 수 있다는 건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영화관이라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공간, 그리고 그 공간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스크린에 도달하는 빛을 우리가 지켜보며 웃고 울고 또는 전율하고 소름끼쳤으며 감동했던 그 경험은 한 번 씩 있지 않았는가, 35명의 거장들의 이런 경험들이 녹아 들어가있는 3분짜리 단편 영상들을 보며 우리도 그들이 그랬듯이 웃고 울고 전율하고 소름끼쳐하고 감동하는 간접경험을 이 영화를 통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것도 제대로 못하는 우리들, 왜 굳이 큰 걸 하려는 것일까?"
-짐 해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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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이라면 한 번 쯤은 필수 감상할 것
자신이 팬인 감독이 리스트에 있다면 감상할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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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커넥션35 (파일조 무비스토리 패널) |
| <저작권자 ⓒ 원하는 모든것 파일조 filejo.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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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영화제 60주년 기념작. <그들 각자의 영화관>(이하, <영화관>)의 목표는 이처럼 자명하다. 거장이라 명명된 35명의 감독들이 모인 것도, 그들이 3분으로 국한된 러닝타임의 과제를 받아들인 것도, 모두 마찬가지다. <영화관>은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 준 영화 그 자체에게 바치는 오마주이자 자신의 일상을 무덤덤하게 발췌하는 수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들의 영화를 존재케 하는 관객을 위한 헌사에 가깝다. 제목에서 발견되는 ‘그들’이란 단어의 의미는 영화를 만든 거장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화를 보는 관객이다. 영어 원제(To each his cinema)의 ‘그들’이 ‘their’가 아닌, 성별이 불분명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his’로 표기된 건 이 때문일 것이다. 왜냐면 ‘그들’이 감독 자신이라면 제인 캠피온과 같은 여류 감독이 포함된 자신들을 결코 ‘his’로 묶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와 같이, <영화관>은 말 그대로 영화를 보는 우리들, 즉 관객을 바라보는 감독들의 자발적인 주객전도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3분이라는 폐쇄적인 러닝타임을 통해 무려 32작품을 나열하는 <영화관>은 각각의 작품을 매만진 주인들의 이름만큼이나 매혹적인 것들로 채워졌다. 32구간의 여정은 프랑스 다큐멘터리의 거장 레이몽 드파르동의 <야외 상영관>에서 출발해 영국의 대표적인 좌파감독 켄 로치의 <해피 엔딩>에서 멈춘다. 3분이란 짧은 시간 안에 보여지는 제 각각의 사연들은 무덤덤하게 현실을 응시하거나 희극과 비극을 넘나드는 상황으로 연출되며, 우연처럼 보이는 상황극을 그려내거나 감각적인 영상을 통해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이 일맥상통한 건 하나같이 스크린이 걸린 영화관-실내가 됐든, 실외가 됐든, 절대명사적 공간 의미가 아닌 영화를 트는 장소로서 명명되는-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극장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를 보기 위한 이들이지만 그들의 태도는 각기 다르며 그들이 모두 다 하나같이 영화에 매혹되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 것도 아니다. 단적으로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가 상영되는 극장의 텅 비었다시피 한 상영관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며 영화에 몰입한 늙은 매표원과 그 뒤에서 격정적인 애무를 즐기는 연인이 등장하는 안드레이 콘잘로브스키의 <어둠 속의 그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영화는 애무를 즐기는 연인을 조롱하지도 혹은 늙은 매표원의 진지한 관람 행위를 미화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본다. 그들의 상영관은 각자에게 개별적인 의미가 있을 뿐, 그 자체로서 규정된 가치로 이해되지 않는 공간이다. 감상의 다양성과 영화에 접근하는 태도의 차이는 상영관에 다양한 풍경을 연출한다. 거장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감독들은 각자의 양식으로 자신만의 상상을 스크린에 담아낸다. 그 안에는 심오한 의미적 해석도, 혹은 가치 부여에 대한 동기 유발도 하나같이 무의미하게 만드는 순수한 영화가 있을 뿐이다. 영화를 기다리는 시골 아이들의 눈동자도,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흘리는 감동의 눈물은 영화를 위대하게 만드는 가치이자 영화를 존재케 하는 이유다. <상영관>은 우리가 영화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혹은 영화란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에 대해서 한번쯤 되묻고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란 지나친 예술적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되지만, 자본의 수단으로 몰락해서도 안 되는 것임을, 우리는 이를 통해 한번쯤 재고할 필요가 한다. 지나치게 경도된 취향을 계급주의적으로 강요하는 것도, 포식자의 식성처럼 유희적 탐욕을 남발하는 것에 대해서 경계할 필요가 있다.물론 우리는 모두 다 ‘그들 각자의 영화관’을 찾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같은 것을 보면서도 다른 꿈을 꾼다. 어떤 이는 팝콘을 씹어대며 낄낄거리고, 어떤 이는 눈가에 글썽거리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흘려 보낸다. 어떤 이는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어떤 이는 결벽하게 오로지 스크린만을 응시한다. 각자의 취향대로, 혹은 관람의 목적대로, 그들은 상영관을 찾음으로써 영화를 존재하게 만든다. 거장들이 그들에게 바치는 경배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화를 사랑하듯 자신들의 영화를 사랑해주는 관객들에게 진심 어린 헌사를 보내고 있다. <상영관>은 바로 관객이라는 지지자를 위한 영화의 애정 어린 편지와도 같으며 관객화된 영화의 객석관람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은 것도 제대로 못하는 우리들은 왜 굳이 큰 걸 하려는 걸까.’ 영화가 인용하는 짐 해리슨(Jim Harrison)의 말은 32편의 짧은 영화들의 태도를 함축한다.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때로 영화를 통해 꿈을 꾼다. 그건 우리가 어리석은 인간이라서 만은 아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현실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기에, 그 현실을 완전하게 이루고 싶다는 꿈을 꿀 수 있다. 영화가 존재하는 건 우리가 꿈을 꾸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꿈을 꾸는 한, 극장은 언제나 존재할 것이며 언제나처럼 우리는 영화를 통해 자신의 꿈을 확인하고 되새길 것이다. 그건 평범한 거장이나, 위대한 관객이나 마찬가지다.
2008년 5월 8일 목요일 | 글_민용준 기자 (kharismania@movi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