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플라워
Steel flower , 2015
<스틸 플라워>는 박석영 감독의 <들꽃>에 등장한 세 소녀들 중 가장 어리고 마음 약했던 하담의 이야기다. 각각 열여덟, 열일곱, 그리고 열여섯이었던 어린 소녀들은 자신들의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출을 감행하지만 가출한 여자아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소녀들은 악한 어른에게 착취당하고, 지금까지보다 더한 환경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다. 결과적으로 그 소녀들의 삶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스틸 플라워>의 하담은 혼자다. 그리고 웃지 않는다. 누구와도 가까워지지 않고, 혼자서 떠돌며 오로지 춤을 추는 일에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한 소녀가 있다. 긴 머리에 마른 체격,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소녀는 자기 몸만 한 트렁크와 가방을 맨 체 거리를 헤맨다. 하담이라는 이름의 이 소녀가 어쩌다가 거리를 헤매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그녀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만이 그려진다. 가방을 끌고 세상을 헤매며 어떻게든 살아가려 하지만, 집도 전화번호도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일을 구해도 적응하지 못한다. 스토리가 진행되는 내내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는 하담은 마치 원시시대 사람 같다. 어렵게 일자리를 구한 식당에서도 적응하지 못해 쫓겨나며, 일하고 싶다는 의지는 있으나 몸도 마음도 그 의지를 따라가지 못한다.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다. 그녀를 통해 보여주자 하는 것이 뭔지, 한참을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영화에서 하담이 겪는 각종 핍박과 부조리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떠올린다. 하담은 어디서 왔을까. 그녀의 부모는 누굴까. 물론 세상의 모두가 가족의 품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안이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연속해서 덮쳐오는 불행과 불행 앞에서 단 하나라도,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하담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하담은 춤을 배우고 싶어 한다. 거리를 헤매다 우연히 본 댄스학원에 매료된 하담은 거리에서 홀로 춤을 춘다. 딱딱한 운동화 밑창으로도 소리는 경쾌하다. 하담은 춤을 춘다.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앞뒤로 오가면서. 달리고 뛰며 하담은 자신의 불행한 삶을 견뎌 나간다.
영화 속 하담은 미래가 없는 사람이다. 당장 오늘 하루를 살아나가기에도 벅차다. 오늘이 너무나 힘들어서 내일을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오늘을 살아가고 싶어 한다.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최종적으로 하담이 가려는 곳이 어딘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 그녀를 응원하고 있다. 하담에게 밀려오는 불행들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물론 하담이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선한 사람도 있다. 모든 곳에서 차갑게 거절당한 하담을 받아준 마음씨 좋은 가게 주인이 있다. 하담은 그곳에서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하담을 착취했던 횟집에서 그녀를 찾아 온 것이다. 무차별적으로 폭행당하지만 가게의 손님들은 철저히 제3자의 입장을 고수한다. 하담은 또다시 거리로 나간다. 간신히 찾아낸 ‘있을 곳’ 마저 잃어버린다.
하담은 끊임없이 춤을 춘다. 차가운 세상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춤추는 일이다. 탁탁거리면서 땅을 박차는 소리만이 그녀의 삶에서 유일하게 경쾌하다. 어두운 밤, 외로이 서 있는 가로등, 바닥을 구르는 가방과 차갑고 무표정한 하담의 얼굴. 하지만 춤을 추는 순간만큼은 행복하다. 그 순간만큼이 유일하게 따뜻하다.
이 이야기가 과연 하담 한 사람만의 이야기일까. 지금 이 시간에도 거리를 떠돌며 부당한 대우를 받음에도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통계자료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 평범한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묵직하고 차가운 분위기 속에서 손발이 얼어붙는 것만 같다.
극중 하담은 집을 찾아 방황한다. 추운 날씨에 머무를 수 있는 집은 무엇보다 절실하다. 그러나 벽면에 나붙은 보증금과 월세조차도 하담에게는 너무나 큰 금액이다. 그래서 돈이 필요하다. 돈을 벌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다니지만, 마음을 닫아버린 그녀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지 않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 한 마디로 생존 욕구를 위해 살아가지만 하담에게 돌아오는 사람들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결국 하담은 거리의 소녀가 된다. 추운 날씨에 풍찬노숙을 하며 훔친 음식 쪼가리로 끼니를 때운다. 일자리를 찾아 방황하지만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겨우 찾은 안식처마저 악한 사람의 손에 부서져버린다.
극중 달리고 달리는 하담이 최종적으로 도착할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지금보다 따뜻하고 행복할까. 그녀가 누구든, 어디에서 왔든, 어떻게 살아가든 바라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하담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어둡고 차가운 세상에서 밝고 따뜻한 곳으로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무거운 가방을 끌고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일은 이제 끝났으면 좋겠다. 전작의 제목은 여리고 하늘하늘한 들꽃이었다. 그렇다면 강철처럼 꺾이지 않는 스틸 플라워라는 타이틀 앞에서 하담은 한층 강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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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hmj (파일조 무비스토리 패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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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에서 가출 소녀들의 삶을 다룬 박석영 감독은 <스틸 플라워>에서도 사회로부터 외면당한 하담의 내면에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들꽃> 속 소녀들과 달리 <스틸 플라워>의 하담의 이야기는 희망적이다. 주소도 전화번호도 없이 일자리를 구하는 하담의 상황은 암담하기 그지없지만 그 가운데서 탭 댄스를 꿈꿀 수 있는 그녀의 삶에 대한 태도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특히 영화의 엔딩에서 모든 것을 휩쓸 듯한 파도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탭 댄스를 추는 하담의 모습은 압권이다. 극도로 절제된 대사에도 불구하고 하담의 내면에서 고함치는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한 정하담의 연기력은 단연 <스틸 플라워>의 가장 큰 볼거리 중 하나다. <스틸 플라워>는 영화 초반에 하담의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 답답함을 인내할 수만 있다면 그 시간을 결코 헛되지 않는 순간으로 보답하는 묵직한 독립영화다.
2016년 3월 31일 목요일 | 글_최정인 기자 ( jeongin@movist.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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