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엄마 ‘경아’에게 딸 ‘연수’는 믿고 의지할 유일한 존재다. 어디에 내놔도 자랑스럽고 행여라도 세상의 위험에 노출될까 봐 조바심 난다. 친구이자 가족 그리고 때때로 자기자신이다. <경아의 딸>은 딸이 이별 후 사이버 성범죄를 당한 후, 드러난 모녀간의 균열을 차분하게 응시한 작품이다. 각본과 연출을 맡은 김정은 감독은 모녀의 주체적인 삶을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딸의 독립으로 출발한 영화를 엄마의 독립으로 마무리 지었다. 첫 장편 영화로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꺼내든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경아의 딸>은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CGV 아트하우스 배급지원상, 왓챠가 주목한 장편상을 수상했다. 축하한다. 소감과 기억에 남는 관객의 반응이 있다면.
전주국제영화제는 사전에 언질을 전혀 주지 않아 호명되는 순간, 게다가 연달아 호명되어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웃음) 3~4년 전부터 영화를 기획했고, 코로나 시기에 어렵게 찍었는데 이에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영화제 GV에서 관객과 만나 직접 질문을 주고받는 게 참 오랜만이라 여운이 남는 현장이었다. 무거운, 다소 민감할 수 있는 주제를 모두가 이입하도록 따뜻하게 풀어내어 감사하다는 평이 기억에 남는다. 또 한 중년 남성분은 영화 속의 가해자에 분노했다면서 남성이 봐야 할 영화라고 말씀주기도 했다.
딸 ‘연수’(하윤경)가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사이버 성범죄를 당한 것을 계기로 엄마 ‘경아’(김정영)와 균열이 드러나는 인상이다. 이런 소재를 다룬 까닭 혹은 계기가 있다면.
2018년 웹하드 카르텔이 한참 세상에 알려졌을 때, 나 역시 크게 충격받았고 관심을 갖게 됐다. 다만 이런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프로파간다 식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이버 성범죄의 피해자인 여성이 받을 고통의 한가운데는 순결에 대한 어떤 폭로가 있지 않을까 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성에게 여전히 강조되는 (순결 등의) 가치들을 지키지 못하거나 어긋날 때 여전히 이에 대한 사회적 비난의 시선이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좀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 공감하는 면이 있다. 자기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세상에 유포되어 이를 지인이나 가족이 볼 수 있는 상황에 놓인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다소 무거운 주제라도 많은 분이 보고 공감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야기를 꺼내 들게 됐다. 사건을 계속 만들고 이를 따라가기보다 인물의 감정을 좇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사회적인 인식이 변했다고 하지만, 말씀한 시선이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한다. 엄마 경아는 과거에 당한 가정 폭력 등 부당한 행동에 침묵하고 인내해온 인물이다. 그래서 딸에게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보호본능에 기인한 여러 간섭을 한다고 생각한다.
경아는 구시대적인 가치관과 가부장적인 제도 안에서 여성에게 부과된 역할을 수행하며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살아온 인물이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충실히 그 역할을 소화했고, 그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본인의 삶을 어떻게 보면 희생해 왔다. 가정 폭력의 피해자임에도 주변의 말도 안 되는 오해로 원인제공자로 2차 가해를 당한 과거도 있다. 그렇기에 딸만은 자기와 같은 삶을 살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 그리고 딸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면도 있어서 딸에게 계속 ‘안전’을 강조하고 과잉에 가까울 정도로 보호하게 된다. 또 가부장적인 가치가 내면화돼 있어 무의식적으로 딸에게 대물려 강요하기도 한다. 딸인 연수는 사고와 가치관에 있어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연수는 엄마를 위하는 마음에 호응해 온 거로 보인다. 이런 삶을 뒤흔들 사건이 없었다면 연수와 경아는 표면적으로 평온한 관계를 유지했을까. 문득 궁금하더라.
연수는 기본적으로 엄마에 대한 연민을 지닌 인물이다. 엄마가 헌신적으로 가정을 유지했기 때문에 자신이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인 교사가 되었다는 마음도 있다. 자신을 서포트해준 엄마에 대한 감사와 폭력에 노출돼 오랜 세월을 보낸 엄마를 향한 연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행하는 간섭과 통제, 푸싱에 대한 답답하고 갑갑한 마음이 쌓여 있어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어쨌든 자기 일에 열심이고, 학생들(의 연애 등)에게는 관대한 선생으로 단단하고 주체적이면서 허용도가 큰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헤어진 남친과) 영상을 찍는 것에도 동의했으니 말이다. 이런 사건을 겪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한번 갈등이 터지지 않았을까. 연수는 아직 사회초년생이라 시간이 흐르며 결혼 등에 관해 엄마 경아와 가치관이 충동했을 법 싶다.
자기 앞가림에 확실한 연수지만, 영상이 불법으로 유출된 후 학교를 휴직하고 또 사람들 앞에 서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사이버 성범죄가 얼마나 파괴적인지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범죄의 피해자가 자비를 들여 영상을 삭제하는 상황은 미처 놓쳤던 지점이다. 취재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2019년 취재 당시에는 한국사이버대응센터라는 민간단체가 있어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여러 분야의 활동가가 봉사의 개념으로 불법으로 유포된 동영상을 삭제하고 법률적인 조언을 무료로 지원했다. 하지만, 워낙 피해자의 의뢰가 많아 시간이 걸리고 그러다 보니 사설 업체를 이용하는 분이 많았다. 시간 싸움이라 조금이라도 (영상이) 더 퍼지기 전에 비용이 들더라도 빨리 내리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재는 디지털 성범죄 지원센터가 생겨서 민간단체와 함께 피해자를 돕는 거로 알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사회적인 인식의 변화가 아직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경찰서를 찾아가는 것 자체가 힘든 경우가 많다. 영상물 등을 증거로 제출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조사하는 사람들이 해당 영상을 보게 되니 이때 포기하거나 좌절하는 분이 다수다. 여성 수사관을 배치한다고 하지만, 아직은 보편적이지 않은 실정이다. 단순히 영상의 삭제만이 아니라 법률적인 지원, 심리지원 등 다각도의 지원 체계를 고안하고 이를 시스템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이 절실하다.
연수는 당신과 같은 연령대라 그의 사고와 정서가 나름대로 가깝게 느껴졌을 것 같다. 엄마 ‘경아’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 참고한 자료가 있다면.
어머니께 의견을 많이 구했다. 영화의 내용을 이야기한 후 경아가 연수에게 이런 모진 말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다. 어머니는 당연히 충격받겠지만, 그렇게까지 얘기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하시더라. 스태프들에게도 해당 대사와 관련해 리뷰를 받았는데, 사실 다양한 반응이 있으면 좋겠다고 내심 기대했는데, 예를 들면 딸의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도울 거야 등등 말이다. 한데 의외로 경아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많았다. 저런 표현까지는 조금 잘못됐지만, (엄마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연수가 당한 일을 계기로 경아는 마치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한 걸음 내딛는 인상이라 영화가 경아의 성장으로 귀결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언가.
20대 관객은 연수에, 경아와 비슷한 연령대는 경아에 이입하는 경향이 있다. 세대에 따라 다양하게 느끼기를 바랐는데 과연 그런 것 같더라. 초반 연수의 독립으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나중에는 경아의 독립으로 귀결되도록 의도한 점도 있다. 또 두 인물 모두 영화의 중요한 축이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부분이 있다. 경아와 연수, 그러니까 엄마와 딸이 각자 서로 독립하고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길 바랐다. 세상 밖으로 나온 경아는 딸의 든든한 조력자로 나아가지 않을까. 중요한 건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이런 두 사람을 응원하고 싶었다.
모녀로 분한 김정영 배우와 하윤경 배우는 사실적인 연기로 극에 힘을 싣더라.
독립영화, 드라마, 연극 등 다방면에서 활동한 정영 선배는 말할 것도 없고 윤경 배우도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로 얼굴을 알리기 전부터 독립영화를 통해 좋은 연기를 보여왔다. 평소 눈여겨보던 참에 제안 드렸고, 이야기 자체가 조금 무겁기도 하고 쉽지만은 않은 역할인데도 두 분 모두 이야기와 캐릭터에 공감하고 선뜻 수락해 주셨다. 정영 선배는 ‘경아’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면서 무엇보다 그가 반성하는 어른이라 좋다고 했다.
장편 데뷔작인데 메이드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겠다. 과정을 간략히 소개해 달라.
2018년부터 이 주제에 관심을 가졌고 2019년 인천영상위원회에서 지원하는 기획·개발 과정에 선정되면서 한 1년 동안 시나리오를 썼다. 원래는 연수만을 주인공으로 했는데 그렇게 하니 이야기가 단선적이고 상투적이 되더라. 그래서 지금 같은 모녀의 서사로 발전시켰고, 운이 좋게도 2020년 우연히 제작 지원에 세 군데나 선정됐다. 이렇게 제작비를 끌어모아서 동기들과 같이 만든 제작사인 ‘주마등필름’에서 2021년 1월부터 4월 중순까지 촬영했다.
<경아의 딸>은 주마등필름이 만든 공식적으로는 1호, 비공식으로는 2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웃음) 영화의 프로듀서를 맡은 정승호 감독의 <이장>(2019)에 주마등필름의 멤버들이 메인 스태프로 참여했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이장>이 첫 작품인 셈이다. 대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동기들이라 외부에서 처음 만나는 스태프들과 작업하는 것보다 서로의 스타일을 잘 알아서 보다 편한 데다 끈끈한 유대감이 있어서 든든한 면이 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음…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 한 명의 주인공이 고난을 겪고 이를 극복하기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어떤 갈등과 마찰을 겪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연대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러니까 혼자가 아닌 여러 인물이 협력해서 무언가를 이뤄내는 이야기가 좋다. 물론 출연하는 인물이 많아지면 그만큼 예산도 커지고 여러모로 어려운 점도 있겠지만, 그래도 함께 헤쳐 나가는 이야기, 어쨌든 사람 냄새 나는 인간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당신이 생각하는 영화의 매력은 뭔가.
고등학교 때는 뭔가를 강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대학교에 가고 졸업하면 취직하는 일련의 과정을 밟는 것에 대해 특별한 생각이 없었다. 내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수동적으로 살았던 거지. 그러다 우연히 영화과에 진학했고, 2학년 때 ‘나’를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들어 오라는 과제를 받았다. 그때 처음으로 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됐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영화를 뚝딱뚝딱 찍었고 결과는 처참했지만, (웃음) 그 안에 내가 보이더라. 영화 안에 당시 내가 생각하고 느꼈던 감정이 신기하게도 담겨 있는 거다! 앞으로도 계속 내가 찍는 영화에 또 내 인생이 담기겠지. 이렇게 담긴 인생이 궁금한 것, 바로 이 점이 영화를 계속하게 만드는 매력인 것 같다. 아직 경험은 없지만, 이건 다른 영상 매체도 마찬가지일 거로 생각한다.
김정은은 어떤 사람인가.
복잡한 사람인 것 같다. 항상 양가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미운 행동을 하면 그냥 미워해 버리면 되는데 한편으로는 이해하고 싶고, 또 이해하게 된다. 되게 피곤한 삶이라고 할지… 그리고 어떤 거를 규정 짓기보다는 좀 더 다각도로 보려고 하는 면이 있는데 이런 성향이 영화를 만들 때는 도움된다. MBTI로는 INFJ, 예수 아니면 히틀러라고 하더라. (웃음) 한없이 사람을 좋아하고 되게 평화주의자였다가도 불같이 화가 날 때는 좀 악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사진제공. ㈜인디스토리
[mail:eunyoung.park@movist.com]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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