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지루한 장마와 무더위를 뚫고 조선의 세 왕자들이 대학로에 떴다. 6월부터 SH아트홀에서 공연 중인 창작 뮤지컬 <왕자대전>이 그 주인공이다. 베테랑 뮤지컬 배우 서범석이 이끄는 프로덕션 ‘광나는 사람들’이 첫 작품 <창업>(2021)에 이어 두 번째로 선보이는 작품이다. 왕이 된 아버지 태종 이방원과 운명의 기로에 선 세 왕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팬덤을 겨냥한 스타 캐스팅, 소규모와 대규모로 양극화된 현재의 뮤지컬 씬에서 ‘광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5~6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중간 규모의 공연, 신인발굴과 육성, 역사 기반 창작 연작극’이라는 방향성은 결코 녹록한 길이 아니다. 험로에 가깝지만, 창작 생태계의 다양성을 향상하고 신인을 위한 무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꼭 ‘가야 할 길’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공연계가 휴장한 시기에 문득 떠오른 젊을 때의 꿈을 실천해 나가는 중인 서범석 총감독을 만났다. 배우에서 연출과 제작으로 그 영역을 확장했지만, 여전히 무대 위가 가장 편하고 관객의 박수에 행복하다며 활짝 웃는다.
# 배우 인생 2막을 열다
배우 활동만도 정신없을 것 같은데! 프로덕션 ‘광나는 사람들’의 시작이 궁금하다.
문득 50세가 넘으며 앞으로의 삶, 특히 직업적으로 어떻게 살지 생각하게 됐다. 25년 이상 열심히 무대에 서 왔는데 코로나 팬데믹으로 처음으로 쉴 수 있는 여유가 생겼거든. 어릴 때부터 작은 소망이 있었다. 언젠가는 뜻이 맞는 사람끼리 모여 작품을 만들고, 좋아하는 공연을 하고 싶다는. 공연이 쉬는 동안 잠시 지방에 머물면서 ‘우리 걸 한번 만들어 보자’고 친구들과 의기투합하게 됐다.
<창업> <왕자대전> 모두 신인 캐스팅이 눈에 뛴다. 신인 발굴과 육성이 결코 쉽지 않은 길인 텐데.
‘광나는 사람들’을 창업하면서 몇 가지 키워드가 있었다. 창작과 신인 캐스팅 두 가지다. <창업> 당시 24명의 배우를 트레이닝했고 그중 16명이 무대에 섰다. 사실 신인만을 캐스팅한다는 계획은 무모하다고 할 만큼 어렵고, 그렇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방송이나 매스컴 노출이 약하다 보니 배우 한 명 한 명이 인지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거로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그 속도가 더 더디더라. 신인 발굴과 육성은 어렵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아닌가 한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한 친구들이 약 4,000명 정도다. 이들이 오디션을 볼 기회가 적고, 오디션을 통해 입봉하려면 더더욱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 쉬운 길은 아니지만,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건 굉장히 쏠쏠한 재미가 있어서 계속하게 된다. (웃음) 다만, 트레이닝을 통한 배우의 실력 향상과는 별개로 인지도를 높일 또 다른 방안이 필요하겠더라.
태종 ‘이방원’ 역의 박상돈&곽동현 배우를 비롯해 뮤지컬에 처음 도전한 ‘충녕대군’ 역의 한태이&배승민 배우까지 캐스팅 비하인드 혹은 꼭 ‘이 배우여야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풀어놔 달라. (웃음)
<창업> 때 모든 캐스팅을 신인으로 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하면 (안타깝지만) 티켓 판매가 정말 힘들어진다. 마침 기회가 닿아 ‘팬텀 싱어’ 출신인 박상돈, 곽동현, 김현수 세 분을 캐스팅했고, 이들이 <창업>을 먹여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웃음) 나중에는 이재윤 씨까지 합류해서 뒷심을 몰아줬다. 덕분에 장기 공연과 신인과의 작업이 가능했으니, ‘광나는 사람들’의 개국공신과 같다. 이 배우들은 공연을 거듭하면서 연기적으로 너무 성장해서 어디에든 누구에게든 자랑하고 싶을 정도여서 <왕자대전>에 당연히,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미스터트롯2’ 출신 한태이, ‘골드차일드’ 출신 배승민 배우는 신인 + 팬덤을 가진 분들이라 여러모로 부합되는 캐스팅이었다.
<창업>은 연출과 제작을 <왕자대전>은 총감독을 맡았다. 배우, 연출, 제작자라는 포지션의 변화에 따라 집중하는 포인트가 달라지겠다.
이번에 연출을 직접 하지 않은 건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시선이 필요해서였다. 한편으로는 <창업> 때만큼 올인할 시간이 없었기도 하다. 다행히 이종오 연출이 올인해 줬다. 배우로서 무대에 설 때는 역할을 더욱 딥하게 파고 든다면, 총괄할 때는 극에 관여하는 배우든 스탭이든 모든 인물을 면밀하게 관찰하게 된다. 그래야 적재적소의 조언이 가능하거든. 또 제작 영역에 있어서는 나 역시 초짜라 조명, 영상, 무대 디자인, 세트 제작 같은 연기 외적으로 공연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 여러 롤을 해보니 역시 배우로 연기만 할 때가 제일 편하고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웃음) 연기는 지금도 너무 재미있고 관객과 만나고 박수 받는 것도 너무 행복하다.
# 역사로 동시대를 이야기하다
<창업>은 조선 건국 이야기를, <왕자대전>은 태종 이방원과 그의 세 아들 이야기를 다룬다. 역사에 기반한 연작인 셈인데 조선 역사에 주목한 까닭은.
과연 이 시대에 어떤 뮤지컬이 걸맞을지 고민해 보니, 해외 소재도 많지만 역시 한국적인 소재나 역사가 좋겠다 싶었다. 그렇다면 조선 건국이야기로 출발해보자 싶었다. 요즈음에는 흔히 사용하지만, 사실 창업(創業)은 ‘나라를 연다’는 매우 큰 의미를 담은 단어이다. 출발선에 선 ‘광나는 사람들’도 새롭게 문을 연 거 아닌가! 게다가 이방원은 연극적으로 너무나 매력적인 캐릭터로 ‘햄릿’이나 ‘오셀로’ 이상이다.
태종 이방원과 세종을 비롯해 그 세 아들은 영상화의 단골 메뉴다. 창작 뮤지컬의 매력은 뭘까.
당연히 노래의 힘이다. 대사와 연기 외에 ‘노래’라는 강력한 힘이 있고, 많은 관객이 이를 보러 오신다. <창업>도 마찬가지지만, <왕자대전>의 넘버들이 솔직하게 너무 좋다. 이종오 연출가가 음악적으로 너무 뛰어난 분이라 캐릭터마다 레퍼런스를 아주 잘 짰다. 한 작품에 어떻게 이렇게 좋은 곡이 많이 들어있냐고 감탄하는 분들이 많다.
<창업>이 퓨전 창작 사극이라면 <왕자대전>은 정통 사극으로 그 분위기와 결이 다르다.
<창업>의 각본을 쓴 강병헌 작가는 자기 시선으로 세상을 꼬아 볼 연륜 있는 분이다. 해서 조선시대 역사를 동시대의 눈으로 바라보고자 퓨전극으로 기획했고, 현대적인 의상과 말투, 영어 사용 등을 사용하기 때문에 거리감 없이 편안하게 볼 수 있다. 김경택 작곡가는 이에 걸맞은 힘 있는 넘버를 작곡해줬다.
<왕자대전>(조은아 극본/김은지 작곡)은 여성 작가와 여성 작곡가가 참여해서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정통 사극으로 가져갔다. 이번에는 태종, 그의 세 아들 그리고 원경왕후까지 너무나 드라마틱한 이야기와 캐릭터의 향연인데 특히 ‘아버지’ 이방원의 마음을 담고 싶었다. 어느 분은 ‘왜 모두 주인공이냐’고 묻지만, 또 다른 분은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섬세하게 어우러졌다고 평하기도 한다. 이렇듯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 있다. 요즘 관객은 취향이 확실해서 잘 만들어 놓으면 자기만의 취향으로 즐기는 것 같다. 관객의 마음을 간파할 수 있다는 내 평소 소신은 너무 오만이었다! (웃음) 트렌드를 추종하거나 누군가의 선호에 입맛을 맞춘다는 개념이 아니라, 자기만의 시선과 개성으로 퀄리티 높은 극을 만들면 이후 감상은 관객의 몫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는 애기다.
향후 라인업은 어떻게 되나.
연작을 공언했으니 최소 다섯 편은 이어갈 각오(?)다! 무대에 올리기까지 <창업>은 3년, <왕자대전>은 대략 1년의 시간이 걸렸었는데 다음 편은 내년 5월을 목표로 준비 중이다. 규모는 (지금보다) 좀 더 크게, 약 600석 정도의 공연을 기획 중이다. 기간이 빠듯하지만, 일단 목표를 세우고 달려가야 한다. 내용은 세종과 장영실의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영화 <천문>에서도 다룬 소재이지만, 우린 둘의 관계성보다는 그들의 업적 그러니까 함께 작업한 결과물과 이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그다음은 아직 결정하지 않았지만, 영조와 사도세자나 대원군과 명성황후를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고 싶은 바람이 있다.
창작뮤지컬을 연이어 제작하려면 제작비의 압박도 분명히 클 텐데.
<창업>은 순수하게 내 주머니를 털었었는데, 다행히 <왕자대전>은 스튜디오2046이 공동제작사로 들어왔다. 운이 좋게도 앞으로 같이 걸어갈 파트너를 만난 셈이다. 코로나 시기에 공연 실황의 영상화가 활발해져서 우리 역시 OTT 같은 다양한 매체 활용 방안 또한 검토 중이다.
마지막 질문이다. 국내 창작 뮤지컬 씬의 근황을 간략히 짚는다면.
요즘은 대극장과 소극장으로 양극화되는 추세이고, 마니아층에서 일반인으로 그 저변이 넓혀지고 있다. 소극장의 트렌드는 주로 2인극이나 3인극으로 인기몰이할 수 있는 배우를 캐스팅하고 그에 맞춰 함께 극을 개발하는 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5~6명이 등장하는 작품은 제작 자체를 거의 하지 않는 분위기가 됐다. 이런 흐름 속에서 <왕자대전> 같은 중간 규모의 작품 개발로 시장에서 차별화를 꾀하고 그 명맥을 이어 나가려 한다.
사진. 김종훈 작가
[mail:eunyoung.park@movist.com]글 박은영 기자(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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