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배우의 숙명 같아서 괴로운 장면이에요. 누군들 자식이 죽는 걸 상상하고 그 감정에 이입하고 싶을까요.” 아들 ‘오남’(안재홍)의 시체 앞에서 오열하는 ‘김경자’를 극한의 감정으로 소화해 낸 염혜란의 말이다. “한편으로 연기가 있었기에 삶의 괴로움을 묵묵히 견디어 올 수 있었기도 했죠. 이 고통의 순간 또한 언젠가의 연기 자양분이 될 거로 믿으면서요”. 넷플릭스 시리즈 <마스크걸>에서 이한별, 나나, 고현정이 연기한 세 명의 김모미에 맞서 홀로 꿋꿋하게, 연령과 외모의 변화를 연기력과 분장으로 커버해 가며 극의 중심축으로 우뚝 선 염혜란을 만났다. 전성기라는 칭찬도 연기 호평도 배우의 긴 시간에 한순간일 뿐이라는 염혜란, ‘순풍 불 때 조심해, 중심을 잡아’라고 스스로를 다잡는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간에도 강렬한 캐릭터가 많았지만, 이번 <마스크걸>의 김경자야말로 원탑이 아닌가 한다. 너무 도드라지는 인물이라 수위 조절에 고심했겠다.
너무 파격적이고 센 인물이라 어떻게 풀어나갈지 고민했었다. 자식을 부속품으로 보는 엄마의 비틀어진 모성애를 두고 공감과 비난, 두 부분이 동시에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모미를 연기한 세 배우(이한별 나나 고현정)의 파트에 따라 편의상 1부, 2부, 3부로 불렀는데 1부는 공감대를 이끄는 것이 핵심이었다. 생활력이 강하고 심하게 억척스럽지만, 아들을 끔찍하게 위하는 엄마로 말이다. 2부와 3부에서는 점차 그 선을 넘어 버리고 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시청자의 마음에 다가가는 부분이 있었으면 했다.
말했듯이 모성에서 출발하지만, 경자는 어느 순간 모성의 경계를 벗어나는 모습이다.
사실 모든 행동의 원인과 결과를 모성에서 찾으면 수월해지는 지점이 있다. 우린 이 점을 경계했었다. 김경자는 자기만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으로 매우 편협한 인물이다. 그에겐 종교도 마찬가지다. 기독교를 자기 기준으로 믿는 사람으로 교인이지만, 무당을 찾아가고 찾아가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기도한다. 비틀어진 시각으로 세상을 응징하려는 그릇된 사명감이 있고, 이를 아들을 위한 모성으로 미화하기도 한다.
경자는 아들의 복수라는 이름으로 ‘모미’의 딸인 ‘미모’(신예서)에게 엄마의 죗값을 치르게 하려고 한다. 만약 미모가 손녀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경자는 멈추었을까? 보면서 제일 궁금했던 부분이다.
복수의 마음을 이미 먹은 사람이라 직진 중 되돌리기는 힘들었을 거다. 우선 오남의 딸이라는 걸, 그러니까 손녀라는 걸 알았어도 인정하지 않았을 것 같다. 사실 경자가 알아차리도록 약간의 암시를 시도하려다가 그만뒀었다. 경자가 모른 채 행동하는 편이 더욱더 비극적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또 미모를 보면서 경자가 몰래 눈물을 흘리는 장면도 많았는데 편집됐다. 경자의 집에 보면 큰 돌이 있는데, 이는 경자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아주 상징적인 소품이자 장치다. 복수를 다짐하면서 경자는 단 한 시간도 편하게 발 뻗고 자지 못하거든. 앞에 있는 미모와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데, 마주쳤다가는 13년 동안 갈고 닦은 칼을 못 쓸까 봐서 그렇다. 입고 있는 점퍼도 아들의 것으로 일종의 의식 같은 거였다. 경자에게 이런 갈등이 없었다면 그는 단순히 악인에 불과했을 거다. 갈등을 지닌 빌런이기를 바랐다.
결국엔 김경자 캐릭터에 연민이 생기든가.
끝나고 나니 생기더라. 일종의 측은지심이라 하겠다. 그의 선택을 이끈 건 무엇인지, 과연 단순히 나쁜 사람이라 그런건지 등 여러 생각을 하게 되더라. 이렇게 생각을 하게끔 하는 부분이 <마스크걸>의 장점인 것 같다.
모미는 연령대에 따라서 세 배우가 연기했는데, 당신은 김경자를 홀로 담당했다. 세월의 흐름과 성형으로 달라진 외모까지 연기력과 분장으로 완벽하게 커버했다. (웃음)
처음에는 분장팀의 노고에 고마웠고, 하다 보니 연배 있는 분은 육체적으로 힘들겠다 싶더라. 혼자 경자를 연기하면서 세 명의 모미를 만나는 재미가 있었다. (극 중 표현상) 꼴에 4년제 나온 모미(이한별), 너무 아름다워진 모미(나나) 그리고 십수 년이 지난 후 초연해진 모미(고현정)를 홀로 관통하면서 만나니 좋더라. (웃음)
분장으로 디테일을 살린 부분이 있다면.
1부는 젊은 시절의 경자로 분장팀장님이 ‘이렇게 여러 시도를 한 건 처음’이라고 할 정도로 다양한 모습을 연출했었다. 디에이징은 기본이고 시대에 따른 패션 고증이 들어가야 했다. 또 오 년, 십년 등 세월의 흐름에 따라 헤어스타일까지 함께 변모해야 했었다. 2부는 굳이 분장할 필요가 없지 않나 생각했으나 그래도 했고, (웃음) 3부는 설정상 성형한 이후라 당연히 해야 했다. 그런데 분장하니까 무언가 자유로운 느낌이 들더라. 김모미에게 마스크가 있다면, 김경자에겐 분장이 있다고 할지! 마스크를 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경자의 사투리가 익숙한 듯한 동시에 한편으로는 낯설기도 하다.
목포 사투리다. 알아듣기 힘들다는 반응이 있는데 낯설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하다. 넷플릭스가 자막을 잘 넣어줘서, 소통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웃음) 한편으로는 사투리를 대충 뉘앙스만 흉내 낸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사투리를 사용했다는 의미 같아 기쁘기도 하다. 극 중 경자가 목포 사람이라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목포라고 지정한 상호가 있어서 목포 출신으로 생각하고 접근했었다. 목포와 인접한 여수 출신인 나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어미가 있어서, 지역 분을 모셔서 단어 하나하나 고증을 받았었다. 격한 육두문자도 많았는데 좀 잘라낸 부분도 있다.
세 번째 ‘김모미’역의 고현정 배우와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이후 다시 호흡했다. 고현정 배우는 좋은 배우가 되려면 착해야 하고 대표적인 배우로 당신을 꼽았다.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많은 장면을 함께 한 게 아니라서 나를 기억할까 싶었다. 그런데 너무 잘 보고 있다고, 늘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다고 해서 너무 감사했다. 정말 대선배인데 극 중에서는 경자가 훨씬 나이가 많으니까, 욕지거리해야 하고 때리고 싸워야 해서… 첫 씬부터 몸으로 부닥치는 장면이라 부담감이 있었다. 촬영에 들어가면서 이런 부담감이 바로 사라진 게, 정말 힘든 티를 내지 않고 몸을 불사르며 연기하는 분이라 나 역시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잡게 되더라. 경자가 모든 감정을 꽉꽉 채워서 발산하는 느낌이라면, 모미는 침잔되어 존재 자체로 존재하는 인물이라 선배의 덜어내는 연기가 너무 부러웠었다. 현장에서 나른한 카리스마라고 부를 정도로 등장만으로도 집중하게 만드는 내공을 지닌 분이었다.
‘오남’역으로 이미지 변신(?)한 안재홍과의 호흡은 어땠나. 모자 관계라기엔 나이차가 좀 적기는 하다. (웃음)
내 노안을 믿었다. (웃음) 안재홍 배우가 댄디하고 젠틀한 도시남자, 훈남 이미지로 우뚝 섰는데 ‘이런 덕후 같은 모습을 보인다고? 어둠으로 걸어 들어간다고?’ 하면서 너무 놀랐다. 정말 배우로서 최고가 아닌가 한다. 그 시도가 멋지다. 분장이 진짜 감쪽같았고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봐서 좋았다. 현장에서 우리끼리 ‘송종희의 아이들’이라고, 송종희 분장 감독님의 분신들을 자처하며 서로 농담하고 했었다.
다음 기회에는 안재홍 배우와 연상연하 커플을 하고 싶다고 했다던데? (웃음)
그건 오해다! 재홍 씨가 ‘다음에는 남매로 만나요’ 이렇게 문자가 와서 내가 ‘무슨 소리냐, 연상연하 커플로 가자!’고 답한 것이 와전된 거다. (웃음) 꼭 선남선녀의 사랑이 아니라도 남들이 보기에 이상해 보이고 또 평범하지 않아도 사랑은 아름답지 않나. 사랑이야기를 좋아하니까 언젠가 순수한 사랑에 도전을!
젊은 김경자를 비롯해 그간 ‘아줌마’를 많이 연기해왔다.
한때는 아줌마의 스펙트럼을 완성해보겠다는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런데 중년 여성을 아줌마라는 하나의 단어로 묶어버리는 건 너무 제한적이라는 생각이다. 얼마나 다양한 아줌마가 있는데! 다양한 아줌마를 표현하고 싶고, (내게서) 아줌마를 떠나보내기보다 이전과 다른 새로운 아줌마를 보여드리고 싶은 바람이다.
<동백꽃 필 무렵> <경이로운 소문> 등 드라마와 <증인> <빛과 철> 등 영화까지 종횡무진하고 있다. 전성기라는 표현이 과언이 아닌데 이렇게 여러 작품에서 당신을 찾는 이유는 무얼까.
진짜 복인 것 같다. 시대를 잘 탔다는 생각도 든다. 무슨 말이냐 하면, 시청자와 관객이 다양한 캐릭터의 여성을 보고 싶어 하는 시대적 부름 혹은 수요 덕분이다. 알다시피 배우는 선택받는 직업이라 나를 부른다는 건 그만큼의 수요가 생겼다는 방증일 거다. 솔직히 예전 같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웃음) 예전에 ‘오히려 살을 좀 찌우는 게 어떻겠냐고, 지금의 캐릭터가 애매하다’고 에둘러서 이야기하는 분도 있었다. 그러면 나는 내게 없는 부분을 부러워하곤 했는데, 이젠 내 한계를 인정하기로 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평범한 얼굴이라도 이런 얼굴이 가진 강점을 생각하려 한다. 또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서 여러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는 건 무엇보다 좋은 글을 만났고, 이를 보여줄 플랫폼이 성장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선택받는 직업이라고 했는데, 캐릭터 자체 혹은 그의 서사에 납득하지 못할 경우 어떻게 극복하는지. 또 캐릭터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은.
납득하지 못할 때가 많지는 않다. 이번 <마스크걸>의 경우, 감독님이 직접 글을 썼기 때문에 아주 유연하게 수정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 말이 조금 걸려요, 이렇게 바꿔보는 건 어떨까요’ 등등 의견을 드리면 바로바로 반영해서 빌드업 해주셨다. 경자가 하는 행동 중 너무 힘든 부분은 어느 정도 완화하고 간접적으로 표현하든지 하는 식으로 납득의 여지를 만들어 주셨다. 캐릭터 구축은… 연극무대에서 ‘남의 말이 아닌 너의 말로 하라’는 걸 배웠다. 이렇게 내 목소리로 시작해서 점차 그 인물에 근접해가는 편이다. 한마디로 출발점은 남이 아닌 ‘나’라는 거, 그게 중요하다.
마지막 질문이다. <마스크걸>을 통해 작품 외적으로 얻은 부분이 있다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게 참 어렵지만, 그럼에도 사랑해야 한다는 걸 새삼 알았다. 아마 ‘모미’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 조금은 부족한 자기라도 사랑했다면 다른 삶을 살았을 거다. 사랑의 본질이라고 할지, 결국 자기부터 사랑해야 (남도) 사랑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사실 이미 가진 것이 많은 데도 가지지 못한 걸 보게 되고 이에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는데, 이런 나를 극복하고자 노력 중이다. 온전히 나를 사랑해야겠다는 마음이다.
사진제공. 넷플릭스
[mail:eunyoung.park@movist.com]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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