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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관계에 필요한 건 약간의 거리감 <유열의 음악앨범> 정지우 감독

2019년 9월 5일 목요일 | 박꽃 기자

[무비스트=박꽃 기자]
연인은 몇 년에 걸쳐 우연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다.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했는지 확인하는 대신, 두 사람 ‘미수’(극 중 김고은)와 ‘현우’(극 중 정해인)는 끊기지 않은 인연에 안도하며 상대를 귀하게 여긴다. 실시간으로 일과를 확인하고 매 순간을 검증하다가도 일순간 매몰차게 서로를 ‘차단’할 수 있는 사이에서는 쉽게 느끼기 어려운 순정이, <유열의 음악앨범>에는 담뿍 묻어난다. 소통의 방식은 날로 진화하지만 진정한 교감을 향한 갈증은 더욱 거세지는 때. 남보다 뛰어난 데 없는 평범한 두 청춘이 서로를 향해 오랫동안 보여주는 올곧은 마음은 그래서 심정을 요동치게 한다. 좋은 관계에 필요한 건 어쩌면 약간의 거리감일지도 모른다는 정지우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이유다.

이 인터뷰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유열의 음악앨범>은 ‘순정’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미수’와 ‘현우’는 즉각적으로 연결되고 쉽게 끊어지는 요즘 사회에서는 떠올리기 어려운 애틋한 관계처럼 느껴진다.
순정은 내가 실제로 많이 쓰는 단어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은교>(2012) 때 왜 이 영화를 봐야 하느냐는 물음에 ‘이적요’(극 중 박해일)의 순정 때문이라고 답한 적이 있다. 그게 그 영화를 아우르는 가장 정확한 단어였고 지금 생각해도 그렇다. 영화를 만들다 보면 길을 잃는 예도 있는데 당시에는 그런 면에서는 실패하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은교>의 ‘이적요’와 <유열의 음악앨범>의 ‘현우’의 순정은 조금 다르지 않나.(웃음) 당시 관객의 심정에 크게 작용한 장애물이 ‘이적요’의 나이였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큰 장애물이었지. 하지만 늙은 게 죄인가? 이런 말이 나오는군!(하하) ‘이적요’의 마음만은 ‘현우’와 마찬가지였을 거다.

이번 영화에서도 일종의 장애물로 꼽을 만한 요소가 있다면.
인물의 내면이 품고 있는 기질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나이나 직업, 국경의 차이는 어쩌면 (표현하기에) 굉장히 쉬운 문제다. 어려운 건 자기 마음속이다. 조형래 촬영감독에게 시나리오를 처음 보낼 때 이렇게 설명했다. 자신의 기질 때문에 사랑이 이루어지는 게 얼마나 어려워질 수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될 거라고.

예컨대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미수’가 ‘현우’와의 만남을 꺼리는 모습 같은 것들인가. IMF 국면을 맞은 1997년, 좋아하는 일보다 안정적인 일을 택한 ‘미수’의 삶은 다소 울적하게 묘사된다.
정규직을 보장하는 안정된 직장이었기 때문에 ‘미수’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도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그는 대부분 귀마개를 하고 일한다. 일상의 소음이 너무 센 공간이라 음악을 틀어 놓을 수 없다. 반면 방송국의 두 달짜리 아르바이트를 선택한 친구 ‘현주’(극 중 정유진)는 오히려 음악이 차고 넘치는 공간에서 신나고 재미있게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수’와 ‘현주’의 차이는…
‘현주’는 흥미로운 것을 두려움 없이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재미있는 것 앞에서는 간단하게 결정한다. 부유하거나 선택할 기회가 많기 때문은 전혀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다.

박해준이 연기한 출판사 대표 ‘종우’가 비슷한 면을 대변한다고 본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잘 교육받고, 취직 대신 사업으로 성과를 낸다. 그러나 결코 남에게 고압적으로 굴지는 않는다. 좋은 차를 소유하고 있지만 정장은 잘 입지 않고, 편안한 차림으로 킥보드를 타고 다니며 유머를 구사하는… 이런 인물의 등장이야말로 90년대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다.
아주 정확하게 봤다. ‘종우’는 돈 가지고 까불지 않는, 격 있는 인물이다. 내가 마련한 아주 야심 찬 캐릭터이기도 하다.(웃음) 자존감으로 치면 그가 1등이다. 개인적으로 부러워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부유해서가 아니라, 어쩜 저렇게 쉬울 수 있을까 싶어서다. 자기 싫다는 사람에게 “난 너 좋은데”라고 말할 수 있고 “넌 너무 무거워. 좀 가벼울 때도 있어야지”라고 덧붙일 줄 아는 지혜가 참 부럽다. 나이가 들수록 느낀다. ‘종우’ 같은 방식이라면 우리는 꽤 잘 살아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수’는 ‘종우’를 선택하지 않는데… 왜 그렇게 만들었나.(웃음)
지금 나의 내공으로 그런 결과를 내버리면, ‘미수’가 돈만 보고 ‘종우’에게 갔다는 관객의 지적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람에 따라서는 ‘종우’가 가지고 있는 격을 인색하게 볼 것 같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내가 멜로의 대가가 돼서 진정으로 어떤 단계에 이르면 그런(‘미수’가 ‘종우’를 택하는) 이야기를 꼭 만들어 보고 싶다.

결국 ‘미수’의 선택을 받는 ‘현우’는 어떤가. 소년원에 다녀온 뒤 제대로 된 직장을 얻기 힘들고, 희망 없이 사는 주변 친구들이 끈질기게 달라붙어 죄책감을 종용한다. 평범한 삶을 살기조차 어려운 처지다.
솔직히 말하면 잘생기고 잘나가는 이들의 연애를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들이 어떻게 연애하는지 잘 모른다. 멋진 차를 타고 샴페인을 마시려나… 대부분은 ‘미수’나 ‘현우’처럼 인생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순간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 일상적인 기억을 영화에 담으면 적당한 굴곡을 갖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종우’의 차를 타고 떠나는 ‘미수’를 향해 격렬하게 달려가는 대목이라고 본다. 좀 비참한 기분마저 들더라.(웃음)
나도 비참했다고 생각한다. ‘현우’는 심장이 터질 때까지 달린다. 그게 좋은 방법이어서가 아니라, 달리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청춘의 시기를 보낸 많은 사람이 그 장면에서 아마 ‘현우’와 진배없던 자신의 어떤 순간을 떠올렸을 것이다. 구체적 행동이 다를 수는 있지만 대다수는 (차에 탄 쪽이 아니라) 죽도록 뛰어가는 역할이었을 테니까.(웃음)

그런데도 집요하거나 구차하기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건 정해인이라는 배우 덕일지도 모르겠다. 언론시사회 당시 그 어느 때보다 배우들의 공이 큰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내가 하려던 이야기와 정해인의 몸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잘 어우러졌다. 상대를 만나서 무언가를 대답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애쓰는 상태… 그런 걸 보여주는 건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정해인을 만난 덕이다.

94년, 97년을 지나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미수’와 ‘현우’의 관계에도 슬며시 금이 간다. 이메일과 메신저를 거쳐 당도한 휴대폰의 시대 앞에서 두 사람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시대와 소통 방식 변화에 따라 관계와 사랑의 모습도 조금씩 변화한다.
이메일을 쓰다가 네이트온 메신저가 등장하고 이내 휴대폰 사용이 시작된다. 만약 영화가 조금 더 최근을 다뤘다면 분명 카카오톡도 나왔을 것이다. 의사소통 도구의 변화가 사람의 관계에 엄청나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휴대폰으로 인해 서로를 오해하게 되고, 반대로 상대의 거짓말을 알게 되기도 한다. 거의 요즘의 방식과 비슷하다. ‘왜 전화를 안 받아?’, ‘거기가 어디야?’, ‘카카오톡을 읽은 지 몇 분이 됐는데 답장이 없니?’…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기분이 들고 만다.

‘미수’와 ‘현우’가 지금까지 만나고 있다면 그런 답답함에서 역시 자유로울 수 없겠지.
두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미 우리 모두 그런 ‘스테이지’에 입장했다. 사생활이 공공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표현도 있지 않은가. 이런 말이 옛날 사람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상대에게 내가 모르는 어떤 부분도 있다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일이다. 손바닥의 손금처럼 서로의 모든 걸 다 알아야 할까? 그저 각자의 순간이 있어도 되는 것 아닐까? 좋은 관계에는 절대적으로 어느 정도 이상의 거리가 필요하다는 조언을 믿는 편이다.

실시간으로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에 모두가 중독돼 있는지도 모르겠다. 비단 관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접속과 단절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유튜브 콘텐츠의 전 세계적인 인기에 비춰보면…(웃음)
그런 현상을 보면, 은퇴가 멀지 않았다는 걸 느낀다.(웃음) (유튜브 콘텐츠의) 메커니즘을 영화에 담아볼까 하는 유혹을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내가 재미를 느끼는 이야기들이 많다. 영화를 만드는 게 점점 더 재미있다.

복수와 사랑(<해피엔드, 1999>), 멜로 혹은 순정(<사랑니, 2005>와 <은교>), 시대극(<모던 보이, 2008>), 사회 시스템(<4등, 2014>)을 다룬 이야기까지 당신의 영화는 장르를 구분하기 어려운 느낌이다.
영화를 하고 싶었던 청년 시절의 꿈과 가장 가까운 영화는 <4등>이다. <생강>(1996)이라는 단편 영화를 찍고 장편 영화 연출을 마음먹게 됐는데, 생계를 책임지지 않는 남편을 둔 여자가 노동운동에 나서면서 자기 삶이 왜 이렇게 고단한가를 이야기하는 내용이었다. 그걸 시작으로 지금에 이르렀다.

예컨대 미리 설계된 반전으로 향하는 큰 그림으로 향하는 <침묵>(2017)은 장르 영화에 가까웠다고 본다. 장르 영화에 대한 욕심도 있는 편인가.
내게 깊은 영향을 준 영화는 장르적이기보다는 그 시대를 느끼게 해준 것들이다. 유연목 감독의 <오발탄>(1961)이나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날>(1980)같은 영화를 보고 나면 아 그 시절은 정말 그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구조나 관계, 인물들의 속내로 뼈대를 이뤄서 이 얘기 저 얘기를 만드는 데 관심이 있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한동안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벗어날 시간이 없었다. 무슨 일정을 소화하든 계~속 사람들과 같이 다녀야 하니까.(웃음) 예전에는 그런 순간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몰랐다. 요즘에는 전혀 다른 텍스트를 읽으면서 그 공간을 약간 벗어나곤 한다. 그 순간이 가장 유쾌하다.

사진 제공_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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