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이른바 ‘론스타 외환은행 먹튀 사건’을 영화화한 <블랙머니>는 노장 정지영 감독의 신작이다. <부러진 화살>(2011) <남영동 1985>(2012)를 연출한 그의 새로운 작품이 금융 범죄를 다루고 있다는 소식에 100만 관객이 선뜻 극장으로 달려갔다. 왜곡된 사법 정의와 부패한 국가 권력을 영화를 통해 고발한 정 감독의 소신이 얼마나 뜨겁고 단단한지, 익히 경험한 덕일 것이다. <블랙머니>를 통해 유야무야 잊히는 줄로만 알았던 ‘모피아’의 금융 범죄 사기극을 다시금 수면 위로 끌어올린 정 감독은 영화를 통해 “당대에 언급돼야 할 이야기를 끄집어낸다”고 말한다.
CJ, 롯데 등 대기업의 영화계 독과점을 비판하는 약칭 ‘반독과점영대위’가 10월 국회에서 연 토론회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했다.
대기업이 ‘파워’를 행사해서 시장 질서를 인위적으로 지배, 조작하면 영화는 신뢰를 잃는다. 자신들은 그 힘 덕에 한국 영화를 지금의 위상으로 끌어 올렸다고 자부하는 모양인데, 위험한 생각이다. 개봉 첫날 2천 명의 관객만 든 <워낭소리>(2008)가 350만 관객까지 간 건 영화를 본 관객이 재미있다는 소문을 냈기 때문 아닌가. 요즘 같은 시장 질서에서는 첫날 2천 명의 관객이 든 영화는 일주일 안에 상영이 끝나버린다. 좋은 영화가 묻히고 다양한 영화가 나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럼 영화계도 대기업도 손해 아닌가. 이렇게 가면 망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 독과점 문제는 빨리 해결해야 한다.
당시 영화인의 적극적인 지지와 참여를 주문했는데.
많은 영화인이 대기업에 의존해 영화를 만든다. 그래서 대기업 비판을 하지 못한다. 이건 문제다. 일은 일이고,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 아닌가. 그걸 혼동하면 안 된다.
일단 투자를 받아야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창작자 입장에서는 쉽지만은 않은 상황일 것 같다. 좋은 투자 기회를 만나기가 좀처럼 어렵지 않은가.
맞다. 내 또래이거나 나보다 좀 어린 많은 감독도 전부 ‘놀고’ 있다. 실제로는 노는 게 아니라 기회를 못 만나고 있는 거다. 젊은 투자 실무자들이 나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나이 든 감독에게 (작품에 관한) 비판을 하는 게 조심스럽다는 거다. 감독 입장에서는 억울하지 않겠나. 나이 많은 선배에게 의견 내는 게 힘들 거라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럼에도 무사히 <블랙머니>를 만들어 대중 앞에 선보이게 됐다. 2018년 5월 ‘론스타 영화 제작위원회’가 결성됐다는 보도자료 이후 영화 개봉을 앞둔 올해 10월까지 이렇다 할 영화 홍보가 없었던 거로 안다.
제작과정에서는 되도록 홍보를 안 하는 편이다. 사건 관련자가 이 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걸 알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물론 누가 방해한다고 영화를 못 만드는 건 아니지만, 예컨대 주연 배우인 이하늬와 조진웅이 친한 사람을 통해서 그런 위험한 영화에 왜 출연하려고 하냐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아무리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라도 그런 말을 들으면 머리에 담겨서 연기에 방해가 된다. <부러진 화살>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촬영 종료 3회차를 앞둔 상황이었는데 안성기와 10년 동안 봉사활동으로 알고 지내던 분이 촬영은 다 끝났냐고 묻더란다. 몰래 찍었는데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남편이 영화 속 판사라고 말했다고 한다. 안성기가 영화를 시작할 때 그 얘기를 들었다면 연기할 때 어떤 기분이었겠나.
이른바 ‘론스타의 외환은행 먹튀 사건’을 다루면서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경제에 관한 내용을 쉽게 풀어냈다는 평가다.
나부터 사건이 너무 복잡하고 어려웠다. <부러진 화살> 때는 공판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쓸 수 있었다. 실존 인물이 있었으니 그들에게 물어보고 그대로 캐릭터를 그려내면 됐다. 이번에는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일어난 일을 어떻게 축약해서 관객에게 잘 전달할지 생각해야 했다. 사실과 허구를 어떻게 조합해 그 세월을 극화할지, 어떤 인물을 만들고 어떤 사건을 꿰어 관객을 이해하게 할지 고민하다 보니 시나리오 작업이 어려웠다.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면서 여러 버전이 나왔다.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에 이어 역시 사회 비판 색채가 짙은 작품이다.
당대에 언급돼야 할 만큼 상당히 중요한 실제 사건이 은폐돼 있다면 나는 그걸 자꾸 끄집어내고 싶어 하는 편이다. 그 이면을 캐고 싶다. 이건 취향이다. 삶의 미시적인 문제도 당대의 가치관 속에 있다고 본다. 사랑, 우정, 부부나 자식 관계도 결국 사회 환경이나 이데올로기, 도덕에 의해서 변한다. 미세한 걸 놓고 왈가왈부하기보다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지를 바라보는 영화를 만드는 게 더 재미있다.
관객도 어느 정도 당신의 세계관에 호응해오고 있다고 본다.
스스로 상당히 어려운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웃음) 일반적으로는 신문에서 맨날 보는 골 아픈 사회 문제를 뭘 또 영화로 만드느냐는 시선이다. 나는 그런 생각이 잘못된 거라는 걸 알려주면서 재미까지 줘야 하니까 힘들다.(웃음) 혼자 예술을 한다면 상관없겠지만 나는 관객을 끌어당겨 같이 대화를 하고 싶다. 그런 작업을 하다 보면 세상이 바뀌지 않겠나.
<블랙머니>의 주인공은 검사다. 사건을 추적하는 역할로 검사를 설정한 특별한 연유가 있는가.
당초 고민한 주인공 직업은 신문 기자, 은행원, 형사 등 다양했다. 그런데 이미 경제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경제 전문 기자나 은행원을 주인공으로 설정하면 관객이 그들을 따라가느라 허겁지겁할 것 같았다. 사건을 추적해야 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경제에 관해서 잘 모르는 일반 검사가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황에 뛰어드는 방법을 선택했다. 관객이 ‘양민혁’ 검사와 함께 서서히 중요한 문제를 알아가게 했다.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서초동 촛불’이 사회적 현안으로 떠올랐다. 영화에 등장하는 검사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전과 같지 않은 관객도 있지 않을까.(웃음)
‘양민혁’은 어차피 (개혁대상이 될 만한) 주류로는 가지 못하는 인물이다.(웃음) ‘머리’가 있어서 사법고시를 통과했지만 그리 정의로운 검사도 아니다. 노동 운동 하는 선배에게 왜 그런 걸 하냐고 시비를 건다. 성질이 급해서 편법으로라도 범인을 잡아 실적을 올린다. 영화는 그렇게 자기 성질대로 막 가던 인물이 사건의 실체를 만나면서 자기도 모르게 투사가 돼는 모습을 담는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양민혁’과 ‘김나리’역을 맡은 조진웅, 이하늬의 연기 조합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양민혁’이 상당히 뜨거운 남자라면 ‘김나리’는 냉정하고 침착한 여자다. 대비되는 두 인물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화합 혹은 갈등이 재미 중 하나다. 두 배우에 관해서는 아주 흡족했다. 나는 배우와 서로 눈을 보고 의견을 교환하는데, 내 생각 이상으로 잘해줬다. 하지만 (두 관계에 기대하는 바를) 다 충족시켜주면 관객은 시시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가끔은 배반도 해줘야 한다.(웃음)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현업에서 활약하는 감독으로서, 후배 연출자에게 도움 되는 말을 전한다면.
가장 먼저 하는 말은 되도록이면 이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웃음) 죽어도 하고 싶다면 지독한 이기주의자가 돼야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위해서 가족, 부모, 친구 등 모든 사람을 희생시키는 경우가 많다. 한 작품 엎어지면 (연출 생명이) 끝나기도 한다.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는 운이 좋았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희생당하면서 버텨줬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다.
마지막 질문이다. 당신에게 영화란.
가끔 받는 질문인데 여전히 정리가 안 된다. ‘돈벌이’이면서 삶이다. 아마 다른 일은 못 할 것 같다. 영화 말고는 재미있는 일도 없다. 강단에도 서 봤는데, 못 하겠더라.(웃음)
사진_ 이종훈 실장(스튜디오 레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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