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진로가 불확실한 이십 대는 자기 길을 정한 듯 보이는 삼십 대가, 일과 가정 사이에 고민하는 삼십 대는 일정 부분의 성취를 이루고 안정적으로 보이는 사십 대가 막연히 부럽기도 하지만, 어떤 나이든 그 나름의 고민과 방황과 갈등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러브씬넘버#>는 콘텐츠웨이브와 MBC가 공동제작한 옴니버스 8부작 드라마로 연출을 맡은 김형민 감독의 데뷔작이다. 넉넉하지 않은 예산과 비즈니스적인 제약으로 인해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김 감독은 인생의 터닝포인트에 선 네 여성의 러브씬을 트렌디하게, 편하게, 감각적으로, 또 서정적으로 변주한다. 함정투성이 인생에 빈틈투성이인 ‘우리’, 그런데도 누군가는 이런 우리를 사랑하고 그 사랑에서 희망을 찾고, 그래서 살아갈 수 있다고 전한다.
(* 해당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됐습니다.)
나이대가 다른 네 여성을 주인공으로 8화로 구성된 옴니버스인데요. 이런 참신한(?) 컨셉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궁금합니다.
이 프로젝트의 시작은, 작은 드라마의 의의에 대한 것에서부터였습니다. 저예산 입봉작이라면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욕심이 있었고, 그래서 생각한 소재가 쉽게 시도하지 못하는 소재인 ‘섹스’였습니다. 스물셋의 ‘두아’(김보라)에게, 스물아홉의 ‘하람’(심우)에게, 섹스는 어떤 의미일까. 나이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다가오는 것일까. 인생의 ‘어떤’ 단계이기 때문에 섹스가 또 다른 의미가 되는 걸까 라는 일종의 ‘사회학’적 시선으로 탐구해보고 싶다는 의도에서 시작했어요.
혹시 <러브씬넘버#> 남성 버전은 계획 없으신지요. 개인적으로 보고 싶습니다! (웃음)
음, 비하인드인 셈인데, 원래 #23은 남성을 주인공으로 한, 제가 직접 쓴 2부작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남성버전도 나올 수 있겠죠.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적은 예산으로 또 만들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빚을 많이 졌거든요. 두 번은 못 합니다. 하하
이십 대 초반 ‘두아’(김보라), 스물아홉의 ‘하람’(심은우), 삼십 대 중반 ‘반야’(류화영) 그리고 사십 대에 접어든 ‘청경’(박진희)까지 인물들이 각 나이대의 고민과 시류를 반영하고 있어 보면서 흥미로웠는데요. 각 인물을 통해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또 극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있다면요.
각 인물은 여성 나이의 ‘터닝포인트’를 상징합니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스물셋, 이제 어른이라는 이름표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스물아홉, 여성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자리 잡아야만 하는 서른다섯,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온 내 인생이 이게 맞나 하는 공허감이 드는 마흔둘. 다른 드라마의 제목이지만 ‘이번 생은 처음이라’라는 제목이 참 저희 드라마에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우린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그 나이는 처음이기에 항상 방황하고 또 혼란을 느끼죠. ‘40대엔 안 이러겠지’, ‘50대엔 좀 안정되겠지’라고 생각하지만, 부모님께 물어보면 ‘절대 아니다’가 답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러브씬 넘버의 진짜 주제는 ‘미숙하고 어리석은 우리지만, 그래도 사랑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해요. 인생은 함정투성이고, 우린 빈틈투성이지만, 그 와중에도 ‘누군가는 우릴 사랑하고, 또 우린 그 사랑에서 희망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살아간다.’는거죠.

각 캐릭터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사나 행동을 꼽는다면요.
지금 딱 기억나는 건 ‘반야’(류화영)인데요, 반야는 매일 총을 꺼내서 목에 대고 쏘는 상상을 해요. 그러면서 옥상에서 뛰어내릴 거라고 자신을 협박하는 여자에겐 그러죠. ‘죽고 싶지 않잖아. 누구보다 살고 싶잖아.’라고요. 사실 그거 자기 자신한테 하는 말이거든요. 누구보다 살고 싶고, 심지어 남들보다 더 ‘잘’ 살고 싶으면서 반야는 매일 죽음을 동경해요. 너무 살고 싶은 인물이라, 호흡에 절박해지고, 과호흡이라는 장치도 설정되었을 정도로 살고 싶어 하죠. 죽음을 동경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걸 탈출구로 여기고 위로받는 거로 생각해요. ‘죽으면 내 존엄을 지킬 수 있을까’하는 자기연민이죠. 반야는 저나 작가님이 갖고 있는 깊고 어두운 내면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봐요. 실제로 제가 작년에 서른다섯이기도 했고요.
(캐스팅 관련) 배우의 어떤 면이 캐릭터와 어울린다고 생각하셨나요.
‘두아’역의 보라 씨는 아역배우 출신의 성인연기자라, 아이와 어른의 이미지를 모두 가진 배우라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람’역의 은우 씨는 외적인 이미지 외에도 대사하는 톤과 발음이 하람의 그것과 어울렸어요. 차분하고 섬세하거든요. ‘반야’역의 류화영 씨는 가장 저평가되어 있는 배우라고 생각할 정도로 강력한 잠재력이 있는 타고난 배우이고, 그게 반야와 어울린다고 봤고요. ‘청경’역의 박진희 선배님은 바르고 완벽해 보이는 여성이라는 면에서 ‘어떻게 무너질까’가 관전 포인트인 #42에 누구보다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에피소드가 공통적으로 ‘도발적인 출발과 모범적인 마무리’라는 인상입니다. 혹시 지상파 방송이라는 어떤 제약을 의식한 결과일까요. 각 에피소드의 결말에 관한 감독님의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사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첫 번째 이유는 앞서 말한 ‘이렇게 부족한 나라도 사랑받을 수 있어’라는 막연한 낙관론을 지지하고 싶어서고, 두 번째는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것이 진짜 용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다자간연애(폴리아모리)를 하고, 결혼식에서 도망치는 등 문제적 주인공들의 일탈적 행동들을 일방적으로 편들고 싶진 않았어요. ‘쓸데없이’ 생각이 많다고 여겨지는 주인공들의 비일상적인 행동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남들보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자기 길을 찾는 모습도 있는 그대로 풀어나가고 싶었습니다. 저희 인물들은 모두 일반인들이 겪기 힘든 드라마틱한 순간에서 ‘아,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구나’라는 결론을 천천히, 힘들게 얻어요. 다시 말해, 네 명의 인물 모두 ‘이게 사랑일까?’ 하는 스스로의 불안과 스스로 화해하는 과정을 겪는 거죠. 저는 이런 과정을 통해 ‘당신은 이들의 사랑을 응원하나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29 하람 편과 #32 반야 편은 오직 웨이브를 통해서만 공개되는데요. 그 이유는요. 또 섹스신이 다소 천편일률적인 느낌인데요. 이왕 19금에 지상파 방송 패싱이니 과감하게 혹은 에로틱하게 나가는 것은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데요,(웃음)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도 이 부분이 가장 아쉽고, 가장 할 이야기도 많은 부분인데요. 언론인터뷰에 전부 밝힐 수 없음이 아쉽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수위에 대한 합의도, 심의에 대한 합의도 전부 제 뜻대로만 할 수는 없는 비즈니스의 영역이 있어서 이렇게 ‘중간지점’에 해당하는 결과물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제 머릿속의 상상은 훨씬 구체적이고 자극적이었다는 것만 밝혀둘게요. (웃음)
작가 ‘지성’(김영아)은 모든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이자, 다른 캐릭터의 행동을 촉발하는 인물로 당당하고 쿨하고, 세상 멋져 보이던 반야 편에서 놀라운 반전을 보입니다. 진짜 깜짝 놀랐습니다. 거의 설정 붕괴 급으로 느꼈는데 지성이라는 인물에 대한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웃음)
지성은 헤어스타일도 옷 스타일도 누구든지 한 번 쳐다볼 법하게 준비해달라고 했을 정도로, 깃털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치장에 목숨 거는 속 빈 강정 같은 캐릭터였으면 했어요. 자신의 텅 빈 속을 들키지 않으려고 더 쿨하고, 더 확신에 가득 찬 척하는 거죠. 잘난 척 심한 사람들 보면 ‘저게 진짜일까?’라는 생각을 다들 하지 않나요?
심지어 지성은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그런 소동을 겪고도, 네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해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죠. 다른 인물들은 어떤 의도성 때문에 뭔가를 찾고 받아들이지만, 지성만은 현실성 있는 캐릭터로써 유지하고 싶었어요. 사실 지성은 작가의 시선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고, 이 드라마의 동시대성을 상징하는 인물로도 생각했기에 좀 더 지성을 위한 엔딩도 생각해봤지만, 이게 맞다고 봤어요. 당신 주변에도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살아있을 지성 같은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어요.
반야 편에서 지성이 완전히 무너진 모습이었다가 청경 편에서는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컴백하는데요. 에피소드 간에 시간 흐름이 어떻게 되는지 순간 궁금했습니다.
위의 질문에서 대부분 대답이 되었는데요, 저희끼리는 ‘집행유예’를 받고 나온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하. 그래서 범행도구도 만년필같이 치명적이지 않은 것으로 한 거고요!
영상이 전체적으로 트렌디하고 세련됐는데요, 에피소드별로 색감이나 스타일 컨셉은요. 통일감을 부여하기 위해 별도로 한 장치가 있다면 짚어주세요.
단막극은 대부분 모든 작품이 다른 스텝들로 구성되는데, 저는 작가도 연출도 스텝도 같은 사람들이 하면 어떨까 하는 무모함에서 작품을 시작했기에, 통일성보다는 변주에 중점을 뒀습니다. 굳이 꼽자면, 음악감독님이 같은 테마를 다양하게 편곡해서 각 에피소드에 사용하셨는데 그런 점이 통일과 변주를 동시에 달성하고 싶은 저희 작품의 한 꼭지가 되겠네요.
각 작품의 영상적인 설정은, 트렌디한 #23, 보기 편한 #29, 감각적인 #35, 서정적인 #42를 목표로 했는데요, 그렇게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콘티, 촬영, 색 재현, 편집, 음악 모두 이 테마로 연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준비 중인 작품이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준비 중인 작품은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코믹 가족극이 욕심납니다. 편하게 웃으면서 보다 보면 어느새 눈물도 나는 그런 종류의 작품이요. 너무 꿈이 큰가요? (웃음)
마지막 질문입니다. 요즘 소소하지만 행복한 일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요새 전 하루에 하나씩 다른 드라마 1회라도 보기, 하루에 하나씩 새로운 요리하기, 매일 닌텐도 링핏 (운동 게임) 하기, 매일 새로운 청소거리 찾기라는 사소하고 빡센? 루틴으로 살고 있어요. 생각보다 너무 행복해서 난 원래 이렇게 살라고 만들어진 인간인가? 싶을 정도라니까요.
작품하는 1년 좀 넘는 시간 동안 일상이 완전히 파괴되어서 그걸 찾고 싶은 마음이 컸나 봐요. 사실 행복은 날 자꾸 봐주는 데서 온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기에 가장 좋은 건 내가 뭘 먹고, 뭘 하고, 어디에서 잠드느냐를 자꾸 들여다보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거나 먹고, 아무거나 보고, 그러지 말자는 거죠. 기왕에 코로나 때문에 집에 있을 거면, 집에서 저처럼 부산스럽게 살아보는 건 어떨까요? 하하.
사진제공_콘텐츠웨이브
[mail:eunyoung.park@movist.com]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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