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돌보다, 돌아보다’를 슬로건으로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이하 SWIFF)가 오는 8월 26일(목) 개막한다. 팬데믹 상황에서 그간 영화제가 창출해온 가치를 안정하게 이어가면서도 오프라인의 제약을 뛰어넘어 온라인으로 영역을 확장할 예정이다. ‘무민’ 캐릭터로 유명한 동화작가 ‘토베 얀손’을 조명한 개막작 <토베 얀손>부터 정재은 감독의 데뷔작 <고양이를 부탁해>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 최초 상영까지 동시대를 관통하는 여성영화의 흐름을 오프라인과 영화제 전용 온라인 플랫폼 ‘온피프엔’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연극평론으로 시작해 영화사 신씨네 등 영화와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두루 경력을 쌓아온 박광수 집행위원장은 올해로 세 번째 SWIFF를 이끌고 있다. ‘집중과 확산’의 가치에 걸맞게 그간 SWIFF가 잘 벼려 온 것을 더 잘 벼리기 위해 전면을 넓혀 문턱을 낮추고 소통의 장을 극대화하겠다는 박 위원장을 만났다.
영화제의 슬로건은 그해의 방향성이라 할 수 있다. 올해의 슬로건 ‘돌보다, 돌아보다’의 의미를 짚는다면.
SIWFF가 ‘슬로건 맛집’ 같이 회자되는 분위기라(웃음) 결정까지 고민이 많았다. 집행위원 중 한 분인 변영주 감독이 김금희 작가의 ‘경애의 마음’을 들고 와서 책의 한 구절을 읽는 거다. 그 내용에 모두의 마음이 움직였는데 어떻게 슬로건화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많은 경쟁을 뚫고 ‘돌보다, 돌아보다’가 결정됐다. 돌봄과 보살핌, 사려와 성찰의 의미를 담고 있다. 현재를 잘 돌보고 서로를 잘 돌보고 맥락을 잘 살펴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뉴노멀을 함께 만들어 가자는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 국면에서 맞는 2번째 영화제이다. 지난해의 경험이 올해의 준비에 많은 도움이 됐을 것 같은데 올해 준비 과정에서 특이점이 있다면.
지난해에는 모든 영화제가 허둥지둥한 상황에서 최대한 방어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즉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도록 보수적으로 나간 거지. 올해는 코로나 국면에 대해 좀 더 이해가 높아졌다고 할지, 연초부터 극장과 온라인의 활용에 대해 터놓고 논의한 결과 온/오프라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 결과 관객과 연결하기 위해 가장 좋은 틀은 무엇인지에 집중했다. 그간 영화제가 걸어온 관성적인 길이 있었는데 지금은 영화제가 무엇인지 질문해야 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영화제가 만들어진 시기는 지금 같은 디지털라이징한 환경이 아니었지 않나. 극장 상영을 유지하면서 여러 이유로 영화제를 방문하지 못하는 관객을 온라인을 통해 연결하려 한다. 입출국이 힘든 해외 게스트의 경우 화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만남의 기회를 넓혔다.
웨이브나 왓챠 등 대중적인 OTT 스트리밍 플랫폼이 아닌 ‘온피프엔(ONFIFN)’을 통해 온라인 상영하는데, 플랫폼 소개를 부탁한다.
SIWFF와 장시간 함께 해온 파트너가 만든 플랫폼이다. 독립 영화 온라인 플랫폼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 온 곳이라 영화제의 메커니즘에 대해 이해가 높고, 향후 여성 영화인이 제작한 작품의 유통과 관련한 지원 방안도 함께 찾을 수 있을 거로 기대한다. 올해 초청된 119편의 작품 중 66편을 온피프엔을 통해 상영한다.
물리적, 시간적 기회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영화제의 온라인 상영은 순기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견해는.
지난해 토론토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도 ‘더 많은 사람이 보는 게 중요’ 하다는 취지의 말을 전한 바 있다. 그간 매진을 자랑삼아 해왔던 토론토영화제가 처음에는 온라인 상영에 대해 우려했는데 웬걸, 캐나다 전 지역에서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고 하더라. 레드카펫을 걸어왔던 영화제가 의외의 틈새를 발견했다는 거지. 이런 의견에 일부 동의하지만, 한편으론 관람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영화가 될 수도 있기에 극장 상영은 필요하다고 본다. 특정 시간에 극장이라는 같은 공간에 모인 타인들과 영화에 대해 토론하는 격한 체험은 영화제에서만 가능한 소통의 극대화라고 생각하거든.
올해 쟁점들 섹션 주제는 ‘레디컬을 다시 질문한다’이다. ‘래디컬’은 언제부터인가 페미니즘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를 내포한 표현으로 다뤄지는 것 같다.
‘쟁점들’은 매해 가장 긴급한 여성 의제를 선정하여 관련 영화 상영과 집중 토론을 하는 섹션이다. SWIFF 안의 빨간 맛이라 할 수 있다. (웃음) 올해는 황미요조, 김현민 프로그래머, 이숙경 프로그램위원장 등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위원을 한층 강화했고, 미국 독일 일본 대만 한국 등 지역을 가로질러 근현대 페미니즘 운동에서 가장 논쟁적인 시기였던 제2물결 시기 페미니즘과 근대 초기의 급진 운동 안에서 여성 운동의 역사를 기록한 영화들을 모았다. 이를 통해 ‘래디컬’ 이라는 단어가 세계사 흐름 안에서 특히 여성운동사에서 어떤 방식으로 쓰였는지 맥락을 짚으면서, 지금은 어디쯤인지 질문해 보고자 한다.
SIWFF에서 초청하는 영화의 특별한 기준이 있다면.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성 서사나 혹은 벡델테스트를 통과한 작품이라든지 그런 특정한 기준 없이 완전히 열어 놓고, 그해의 맥락에 가장 잘 맞는 작품을 셀렉한다. 비슷한 질문을 받곤 하는데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2019년 영화제를 맡으면서 급하게 트레일러와 포스터를 만들어야 했었다. 당시 슬로건도 채 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포스터 작가님께 한국에서 살고 있는 예술인으로서 ‘여성영화제’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걸 만들어 달라고 했고, 트레일러를 연출한 전고운 감독에게도 똑같은 말을 했다. 아웃풋을 보니 헤어스타일이 비슷한 여성 둘이 나오는 게, 마치 콘셉트를 미리 맞춘 듯이 흡사한 작품이더라. 결국 동시대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거지. 올해는 집중과 확산의 가치에 따라 SIWFF를 찾는 관객을 더 잘 배려하고, 영화제의 턱을 더 낮추려 했다. 간추리자면 전면을 넓히고 소통의 장을 확산하는 거다. 그간 SIWFF가 잘 벼려온 걸 더 잘 벼리겠다는 거지.
남녀 갈등이 첨예한 트렌드에서 여성영화제의 가치와 역할을 짚는다면.
역차별이나 성별 갈등이라는 말이 있는 상황 자체가 여성영화제가 존재하고 역할해야 한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영화제 간의 글로벌 네트워킹 등 소통과 교류 정도는 어떤지.
지난해 초 베를린 영화제에 갔을 때, 팬데믹 이전이라 가능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세계 여성 영화제 모임이 있었다. 전 대륙에서 온 여성영화제 관계자와 함께해 그간의 경험과 각국의 환경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자세와 태도가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SIWFF 이야기를 하니 다들 깜짝 놀라더라. 이유는 각국에서 한다 하는 영화제지만, 대부분 그 성격이 액티비즘 혹은 학구적인 모임이거나 동호회 같은 성격이 강하거든. SIWFF처럼 20억 원 내외의 예산으로, 팬데믹 이전에는 100여 편이 넘는 영화를 상영하고 관람객이 5만여 명 이상에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여성영화제가 드물기 때문이다. 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았고 크게 힘을 받았다.
감동스러운, 흔치 않은 경험이었겠다.
내 인생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웃음) 국가와 인종, 종교를 떠나서 오로지 ‘여성 영화’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뭉치고 모인 거 아닌가. 이후로는 직접 방문하지 못하니 온라인을 통해 소식을 전하고 있고, 좀 더 깊게 소통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또 SWIFF뿐만 아니라 광주, 제주 등 지역 여성영화제를 소개하니, 더 알고 싶다고 정보를 공유해달라고 하더라. 이런 면에서 앞으로 할 일이 많다. 그들이 제일 많이 한 질문 중 하나가 뭘 것 같나.
글쎄…(웃음)
한국 여성 감독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나와 같은 대답을 한 사람은 없다면서 놀라더라. 2000년대 초반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이 등장한 시기와 비슷한 흐름을 느낀다고, 10여 년 후 오스카는 그녀들의 몫일 거라고 했거든. <우리들>(2015) 윤가은 감독, <소공녀>(2017) 전고운 감독, <메기>(2017) 이옥섭 감독, <벌새>(2018) 김보라 감독 등을 보면 과장이 아니지 않나. (웃음)
심사위원이 열여덟 분이다. 여타 영화제보다 많은 인원인데, 그만큼 꼼꼼하게 심사하기 위함일까.
더 공정하고 꼼꼼하게 심사하겠다는 의지의 반영이자, 다양한 시각을 더 폭넓게 포용하려는 의도라 할 수 있다. 기존의 판단에 의존하기보다 새로운 시선과 시도에 힘을 실어주고자 한다.
올해 SIWFF에서 관객이 꼭 경험했으면 하는 영화나 프로그램을 추천한다면.
개막작 <토베 얀손>은 꼭 보시길! 그야말로 시간이 순삭(순간삭제)이다. 무민 캐릭터로 유명한 핀란드 작가 ‘토베 얀손’을 조명한 작품으로 그녀의 예술적 성취보다 어떤 관계와 성장에 초점을 맞췄는데 ‘토베’는 물론 그녀의 파트너가 정말 매력적이라 설레고 긴장되는 영화다.
정재은 감독의 데뷔작 <고양이를 부탁해> 20주년 기념전도 빼놓을 수 없다. 넉넉하지 않은 예산에도 여차저차해, (웃음)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을 기획할 수 있었고, SIWFF를 통해 최초로 공개하게 됐다. 더불어 영화의 주인공인 배두나, 이요원, 옥지영 배우가 함께하는 데다, OST를 담당했던 음악팀의 공연까지 어우러진 그야말로 축제라 할 수 있다.
SIWFF의 인력 구성은 어떻게 되나.
상근직은 사무처장을 포함한 5명이고, 영화제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6~7개월 동안은 30여 명 정도가 참여한다. 자원활동가를 포함하면 약 100여명 정도 규모이다. SIWFF는 ‘여성’영화제라는 정확하고 확실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어, 공부나 창작 활동 등 다른 일을 하다가도 영화제 준비를 위해 모이는 경향이 뚜렷하다. 영화제를 한 번 치르고 나면 힘들어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지지난해부터 함께한 팀이 올해 모두 복귀해줬다. 이렇게 팀웍을 맞춰 온 과정 자체가 영화제의 큰 자산이라 할 수 있다.
비상근 계약직은 고용의 안전성 측면에서 비단 SIWFF만의 문제가 아닌 모든 영화제가 고민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예산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서울’ 국제여성영화제라 지자체인 서울의 지원과 영진위의 지원을 받지만, 여타 영화제와 달리 SIWFF만 주최가 관이 아닌 민간인, 민간영화제다. 일장일단이 있다고 본다. 영화제의 프로세스를 관이 주도하는 경우 아무래도 관료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린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재원 구조이지만 그만큼 독립도가 크다. 안정적인 재무구성은 어렵지만, 말이다. 덕분에 다른 영화제가 스폰서를 유치하는 게 부가적인 일이라면 우린 그보다는 훨씬 맹렬하게 뛰어야 한다. 20억 원이 못되는 예산으로 다른 영화제의 2배 이상의 아웃풋을 뽑는다고 자부한다. (웃음) 머릿속이 영화제로 가득 찬 분들이 자발적으로 즐겁게, 좋아서 일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어느새 3년째 SIWFF를 이끌고 있다.
영화제를 맡으면서 가능한 한 많은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연결해 모아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평소 많은 사람의 의견을 조율하는데 나름대로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웃음) 집행위원장을 맡아보니 그간 전임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절실히 알겠더라. 취임부터 집행위원회와 사무국과 긴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데 주력하고 있다.
SIWFF가 내부적인 이슈로 부침이 있을 때 선임됐다.
이사회에서 위원장직을 제안했을 때 난감하면서도 하겠다고 마음먹게 된 결정적인 장면이 있다. 내 인생의 찬란한 신이라고 할지. 1회 때부터 SIWFF를 찾은 골수팬 중 하나인데, 당시에는 스크린이 부족해 밤새워 상영하곤 했었다. 동숭아트홀에서 밤을 꼬박 새고 연이어 4편을 봤는데, 쉬는 시간에 불이 켜지니 각 자리를 빼곡히 채운 여성들이 저마다 허리를 두드리며 일어나고 있는 거다. 얼마나 환한 표정들인지! 말로만 듣던 영화를 직접 보고, 그 사상을 확인하고, 영화를 통해 연결되는 현장이었는데 이후의 내 삶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응원과 지지가 됐었다. 또 전고운 감독이 지금의 SIWFF가 있기까지 가꾸고 지켜온 선배에 대한 리스펙트의 마음으로 2019년 트레일러를 맡는다고 했었는데, 그게 딱 내 심정이었다.
밤샘 영화제에 참석하던 당시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SWIFF가 출범한 1997년 당시 연극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잡지 ‘객석’을 통해 등단했고, 수상하러 가니, 심사위원 중 한 분이 ‘여자였어?’ 이러더라. 그 후 한 모임에서 여성학 관련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가서 강의를 진행하는데 사실 쟁쟁한 여성계 선배들이 쭉 자리해 있었거든. 내 이야기를 얼마나 경청하는지… 양쪽의 온도차가 참 다르지 않나.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던 선배들의 시선을 잊을 수 없다.
마지막 질문! 최근 소소하지만 행복한 일은.
얼마전에 아이가 독립했다. 그 아이를 보며 내가 저 나이 때 저랬구나, 우리 엄마는 어땠을지 그 심정을 헤아려 보기도 한다. 또 부모와 자식 관계는 변함없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 새로운 관계 맺음이 시작됐다고 할지, 좀 설레는 심정이다.
사진. 박광희(Ultra Studio)
[mail:eunyoung.park@movist.com]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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