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20회 맞은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독립, 대안’ 특성 확실히 자리잡아
김수용, 임권택, 나홍진, 박찬욱.. 성년(成年) 전주 찾은 감독 만날 흔치 않은 기회
지난해 다큐멘터리 부진 딛고 <삽질> <김복동> 등 색깔 뚜렷한 작품 강세
좋은 영화는 메시지가 분명하고 감독의 올바른 세계관이 반영된 영화
일반 극장에서 상영 어려운 독립, 대안 영화 자리 위해서라도 스크린 제한해야
집행위원장으로서 지난 3년간의 임기를 성실히 마쳤다. 영화제가 20회를 맞은 올해, 새로운 임기를 시작해 네 번째 해를 맞는다. 상투적인 질문이지만 소감을 묻지 않기 어렵다.
20주년이라고는 하지만 모든 게 엊그제처럼 느껴진다. 전주국제영화제 첫 회에 관객으로 참여했고 3회 때는 작품을 출품한 감독으로, 10회 때는 영화의 프로듀서로, 4년 전부터는 집행위원장으로 자리했다. 내가 막 부임했을 때 전주국제영화제는 사무처장과 프로그래머 사이에 갈등이 있는 등 여러모로 말이 많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디지털, 독립, 대안’을 지향한다는 영화제 성격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신인 감독의 작품을 발굴하고 상영하는 데 집중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영화제 평가에서 그동안 잘 해왔다는 인정을 받아 뿌듯한 마음이다.
<자백>(2016)이나 <노무현입니다>(2017)가 흥행에 성공했지만, 전주국제영화제가 투자, 발굴, 상영한 다수의 영화는 여전히 상영될 기회를 충분히 얻지 못하는 상황이다. <어벤져스: 엔드 게임>이 절대다수의 스크린을 품에 안고 극장과 관객을 호령하는 상황에서 영화제의 시작을 알리는 만큼, 고민이 깊을 듯싶다.
나는 일정 수준의 스크린 제한이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다양성이라는 토대가 있어야 문화가 더욱 단단해지는 것 아닌가. 적어도 어떤 영화가 관객과 만나 평가받아볼 기회 정도는 얻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 같은 한국 영화 현실은 매우 아쉽다. 많이 언급되는 프랑스 제도처럼, 예컨대 상위 영화 두 세 편이 전체 스크린의 60% 이상을 점유할 수 없다는 식의 제한이 필요하다. 미국도 한 영화가 전체 스크린의 4~50%만 점유하는데 그 정도도 좋다고 본다.
관객이 보고싶은 영화를 제때 못보게 하는, 일종의 선택권 제한이라는 반론도 있다.
어떤 영화는 평생 관객을 만날 기회를 차단당하는 상황이다. 유명 영화를 하루 정도 늦게 본다고 한들 뭐가 크게 달라지겠는가. 예매 경쟁이 조금 심해지겠지만, 결국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 볼 수 있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자본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나라들이 왜 스크린을 제한하고 있는지를 알아야한다. 묵시적으로만 약속해서는 (극장이) 말을 듣지 않으니 제도적으로 규제하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영화제 이야기를 해보자. 20주년을 맞아 손꼽을 만한 변화를 몇 가지 소개해준다면.
‘뉴트로전주’라는 섹션을 신설했다. 지난 20년동안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은 감독들을 다시 모셔 그들의 최근작을 선보이는 자리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기만의 자세와 방향을 잃지 않고 작업을 해온 분들이다. 그분들을 소개하는 건 우리 영화제의 지향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화려하거나 거창하지는 않아도, 전주국제영화제가 남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에 많은 가치를 부여해왔고 지금까지 그 색깔을 잘 지켜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관객에게 추천할 만한 행사를 몇 가지 짚어달라.
‘백 년 동안의 한국영화’ 섹션을 통해 김수용 감독의 <혈맥>(1963), 임권택 감독의 <짝코>(1979) 등 한국영화사에서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 20세기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나홍진 감독의 <황해>(2010),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2002),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2003)처럼 21세기 한국 영화계에 굉장히 독특한 입지로 자리 잡은 작품도 다시 선보인다. 이 감독들이 영화제에 찾아오는 만큼, 관객은 그동안 직접 만나보기 어려웠던 그들과 교류할 흔치 않은 기회가 생길 것이다.
기존 행사장인 전주 영화의거리 일대를 넘어 팔복동의 팔복예술공장을 활용한다. 1980년대 카세트 공장으로 사용하던 곳을 정비해 지난해부터 전주의 예술가들이 상주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팔복예술공장에서 영화와 전시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적이고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다.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익스팬디드 플러스: 유토피안 판톰’ 섹션이다. 그동안 전주국제영화제는 <자백>이나 <노무현입니다>처럼 당시 정권에서는 만들거나 상영하기 어려운 작품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드센 방식으로 표현의 자유에 집중했다. 이제는 정권이 바뀐 만큼,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를 확장하고 뛰어넘는 새로운 방식의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려고 한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문제를 다룬 <삽질>이나 일본군 위안부 김복동 할머니의 삶을 바라본 <김복동> 등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담은 다큐멘터리도 이번 영화제를 통해 공개된다.
4대강에 관한 엇갈린 평가 속에서 진실이 점차 모호해지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읽어낸 김병기 감독의 <삽질>, 많은 말과 약속들이 오갔음에도 여전히 바뀐 게 없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과 투쟁을 다룬 <김복동> 등 지난해에 비하면 출품된 다큐멘터리의 양도, 질도 모두 좋아졌다. 억압과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자기 작품을 개척해나가는 감동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전주국제영화제는 그동안 많은 다큐멘터리를 발굴하고 소개하지 않았나. 유독 지난 해에만 약세였다.(웃음)
어째서 그랬던 걸까.
촛불 정국이 끝나고 정권이 바뀌면서 많은 사람들이 잠시 투쟁의 방향을 잃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독일의 빔 벤더스 감독도 독일 통일 이후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헤맸다.(웃음) 독일이 분단되었던 시절의 문제점, 히틀러로 대변되는 구세대와 그와는 다른 신세대의 충돌 등을 이야기하던 그의 입장에서는 통일 후에 자기 고민의 한 축이 사라졌다고 느꼈을 수 있다. 다큐멘터리를 하는 목적이 약화하거나, 뭘 말해야 할지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올해는 우리 감독들이 본래 색을 되찾은 것 같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불평등은 여전하고, 왜곡된 현실과 소외된 사람이 그대로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올해 영화제가 추천하는 작품들의 면면을 전해 듣다 보니,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영화란 어떤 영화일지 궁금해진다.(웃음)
감독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그 이야기가 올바른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하고 싶은 말이 불분명하고 세계관이 엉망인 작품은, 나는 관심 없다.(웃음) 물론 메시지를 어떻게 잘 전달할 수 있을지 적절한 방법론을 찾아내는 것도 감독의 역량 중 하나이겠지만, 하고 싶은 말을 정하면 형식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본다. 중요한 건 주제다. 그래서 켄 로치 같은 감독을 좋아한다.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지만, 당시 다수의 평론가들이 ‘동어반복’이라는 지적을 내놓기도 했다. 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건 알겠지만, 늘 똑같은 말이라는 거다.
그래도 계속 해야 한다. 세상이 완벽하게 바뀌어서 약자가 잘살게 되는 세상이라면 굳이 안 해도 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니까.(웃음) 켄 로치 감독이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다룬 이야기는 영국 감독 가브리엘 고셰가 단편 <더 매스 오브 맨>(2012)에서 선보인 이야기와도 비슷하다. 실업 급여를 타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주인공은 관료의 불쾌한 태도와 맞닥뜨리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런 것들이 지금 영국 사회의 중요한 이야깃거리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계속 다뤄야하는 것 아닌가. 켄 로치 감독은 그런 이야기를 가장 잘 하는 감독이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계속 말해야한다는 거군.(웃음)
홍상수 감독의 작품도 비슷하다. 그의 작품 역시 맨날 똑같은 이야기만 한다. 개인의 취향과 관점에 따라서 좋고 나쁨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실제로 반복적인 주제의식이나 작품이 여성을 다루는 태도가 불만스럽다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홍상수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올 해 영화제는 몇 가지 눈에 띄는 변화를 맞기도 했다. 영화진흥위원회 중남미 주재원으로 활동한 문성경 프로그래머를 새로 영입했다.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등과 비교해보면 늘 우리 영화제 프로그래머 수가 가장 적었다. 외국 영화제에 나가면 아침 9시부터 밤 12시까지 영화를 보러 뛰어다녀도 모자를 정도로 소수정예였다. 새로운 프로그래머를 영입해 역할을 분담했으면 했다. 기존 프로그래머가 전부 남성이기 때문에 새 프로그래머는 여성이었으면 했고, 지난 1월 문성경 프로그래머를 영입했다. 과거 전주국제영화제의 스태프 출신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한동안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면서 영화진흥위원회를 통해 남미 영화 관련 소식을 전해준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남미 영화에 관한 정보를 전해 주면서 오랫동안 일해온 영화제 사람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고 있는 상황이다.
당신 말대로 그는 전주국제영화제의 유일한 여성 프로그래머이기도 하다.
문성경 프로그래머는 여성 스태프들과의 소통에서도 큰 역할을 해주고 있다. 남성 프로그래머는 젠더 관련 문제에서 여성 스태프와 소통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어 아쉬움이 있었는데, 굉장한 도움을 주고 있다.
과거 영화제 내부에 성희롱 등의 사건이 있었던 만큼, 관련 문제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상황이라고 본다.
재작년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미투 운동이 일기 전이었지만, 자체적으로 해당 사건을 조사하고 징계를 마쳤다. 한국 사회에서는 그동안 성 관련 문제를 쉬쉬하고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스태프 전체에게 성차별 금지 교육을 하고, 시간상 영화제에 오래 머물지 않는 단기 스태프에게 관련 사고가 생겼을 때는 담당 팀장이 바로 문제를 제기하고 징계위원회에 회부할 수 있도록 투명한 해결 과정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영화제 조직 운영에 관한 변화도 있을 것이다. 근로기준법이 개정으로 주 52시간 노동이 법제화되면서 영화제 스태프의 노동과 임금 문제에 철저하게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다. 지난해 영화제 스태프의 시간 외 수당 미지급 관련 현안도 여러 차례 불거졌다.
지난해 영화제들의 시간 외 수당 미지급 문제가 큰 문제로 부각됐고 전주국제영화제도 행정 미비(임금대장 미작성 등)로 인한 벌금을 받았다. 다른 영화제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잘 했다고 생각하지만, 앞으로는 시간 외 근로수당을 더욱 엄격하게 계산해서 지급할 것이다. 우리 정도 규모의 영화제는 오는 7월부터 주 52시간 제도 역시 철저하게 적용해야 한다. 근로복지, 행복추구권, 노동착취 방지 등을 위해 만든 제도인 만큼 엄격하게 지키는 게 맞지만, 고민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영화제라는 조직이 그 제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켜야 할지에 관한 논의는 쉽지만은 않다.
영화제라는 조직의 특수성을 고려해야한다는 의미겠다.
영화제는 1년 동안 준비해서 10일 동안 모든 것을 쏟아낸다. 그 10일 동안은 아침 9시부터 밤 12시까지 영화 상영 등의 행사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하루 12시간 노동을 초과하면 안 된다는 이유로 행사를 진행하는 스태프가 집에 가야 한다면, 진행의 전문성과 연계성에 문제가 생긴다. 한쪽에서는 인력을 두 배로 늘리고 모두 상근직으로 고용하면 된다고 하지만, 영화제는 국민 세금과 전주 시민의 세금이 투입되는 행사인 만큼 사람을 무작정 쓸 수는 없다. 전체 스태프 100여 명을 1년간 고용하면 인건비만 50억쯤 될 것이다. 그건 영화제 전체 예산보다 많은 금액이다. 취지는 알겠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대책이다.
모두가 만족할 만한 대안을 내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데 공감한다.
차라리 정부가 좋은 방법을 딱 제시해주면 좋겠다.(웃음) 스태프 고용안정성과 관련해 부산, 부천영화제와 함께 논의하기도 했고, 영화진흥위원회도 관련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일단은 탄력근로제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한다. 얼마 전 집행부와 스태프 사이에 관련 문제를 조율, 조정하자는 내용의 서약도 맺었다. 법 개정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최대한 꼼꼼히 준비했지만, 한 해 행사를 치르고 나면 분명 또 다른 문제가 노출될 것이다. 그걸 확인하고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영화제가 개선해나가야 할 또 다른 지점이 있다고 보는가.
장기적으로는 영화제가 스태프 서비스를 줄여야 한다고 본다. 국내 영화제는 너무 서비스가 많다. 외국 영화제는 어린 영화 학도부터 원로 감독까지 직접 관람할 작품을 고르고, 예매하고, 극장까지 찾아간다. 우리나라 영화제처럼 많은 스태프가 오가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한다. 이런 말을 하면 영화제가 갑자기 싹수가 없어졌다는(웃음) 식의 이야기를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영화제 운영의 패러다임 변화가 필요한 때라고 본다.
앞으로 전주국제영화제가 추구할 방향은. 개인적 비전도 들려달라.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 칸영화제나 베를린국제영화제처럼 덩치를 키우자는 게 아니다. 로테르담국제영화제나 클레르몽페랑 국제단편영화제처럼 소박하지만 반드시 존재해야하는 영화제가 되는 게 영화제의 목표이자 내 포부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내가 좋아하는 서머 소닉 페스티벌도 올해 20주년을 맞았다. 라인업이 상당히 좋다. 영화제가 끝난 뒤 거기에 가볼까… 하고 티켓팅 사이트를 오가며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게 좋다.(웃음) 전주에서 일 하다가 우리 스태프들끼리만 아는 맛집에 갈 때도 행복하다. 어떻게 하면 이곳이 외부로 알려지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 집을 지키겠다’는 생각을 한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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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_전주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