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내면에 자리한 열정과 터지는 감정을 표현하는 데 최고죠.” 플라멩코를 10년째 배우는 중이라는 백명선 대표는 실력이 조금씩 향상되는 데서 오는 만족감과 셀프익스프레션을 그 매력으로 꼽는다. 또 춤의 기본인 열두 박자를 변주하며 리듬감을 부여할 수 있어 몸과 머리를 동시에 개발하는 운동이라고 적극 추천한다.
화려한 의상, 격정적인 몸짓과 현란한 손짓, 절도 있는 동작 등 플라멩코 하면 자동으로 연상되는 그림들인데, 백 대표가 춤추는 모습을 상상하니 무척 어울린다. 그간 판씨네마가 제공해온 다채로운 영화 세계와 닮았다는 생각이다. 사직동에 위치한 판씨네마 사무실에서 백 대표를 만났다. 어제와 다르고 또 내일은 오늘과 다른 데서 즐거움을 찾는다는 백 대표와 나눈 한 시간여 동안의 대화를 공유한다.
#History
<예언자>(2009)<서칭 포 슈가맨>(2011)<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기생수 파트1>(2014), <핵소 고지>(2016)<라라랜드>(2016)<안나>(2018)의 공통점은? 영화 수입·배급사 ‘판씨네마’는 이른바 4대 배급사(CJ엔터테인먼트,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NEW)만큼은 아니라도 영화를 좀 본다는 관객에겐 꽤 친근한 이름이다.
2003년 수입·배급업에 첫발을 들여놓은 이후 <트와일라잇>(2008)을 필두로 <비긴 어게인>(2013), <라라랜드>(2016) 등을 히트시키며 120여 편에 이르는 주옥같은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지난 7월 22일부터 ‘코로나19 극복 특별기획전’(영화진흥위원회 지원, 판씨네마 기획·주최)을 열고 전국 14개 상영관에서 상영과 GV등 연관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판씨네마가다양한 상차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간 우리가 수입해 온 영화의 스펙트럼이 넓으니 그만큼 여러 반찬을 내놓는 게 가능했죠.”
이번 특별기획전은 판씨네마가 수입한 영화를 포함해 그간 사랑받았고, 재개봉 요청이 쇄도하거나, 작품성에 비해 아깝게 주목받지 못한 작품 위주로 선정했다. <라라랜드><호우시절><울프 콜><울지마 톤즈2: 슈크란 바바><비행><바람의 언덕> 등이 그 목록이다.
“영화를 다루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우리 영화가 많이 소개돼요. 얼마 전에는 주제가 결혼이라 <45년 후>와 <결혼이야기>를 다룬다면서 모 프로에서 허락 요청이 왔어요. 공교롭게도 두 편 모두 우리와 연관된 영화였죠.”
45년 동안 부부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했으나 외부적 요인으로 파생된 균열을 다룬 <45년 후>(2015)는 판씨네마가 수입과 배급을, 스칼렛 요한슨과 아담 드라이버의 열연이 돋보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결혼이야기>는 판씨네마 국내 배급을 맡은 영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의 국내 배급을 담당하게 된 것에 대해 “넷플릭스가 일일이 통제하기 어려워 규모가 큰 세일즈사에 위임했고, 그 위임받은 세일즈사에서 먼저 제안이 왔어요.”라고 그 경위를 전한다. 아마도 해외 필름마켓에서 다년간 쌓은 신뢰 덕분인 것 같다고. 즉 “인디면서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실수 없이 진행할 만한 업력이 입증된 곳”을 찾았고, 마침 그 적임자가 판씨네마였다는 게 백 대표의 설명이다.

판씨네마는 그간 연간 10편 내외의 새로운 영화를 국내에 꾸준히 소개하며, 세계 필름마켓에서 신뢰를 쌓아왔다. 진두지휘는 물론 수입 일선에서 뛰는 이는 창립 이래 오늘까지 백 대표 본인이다.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었을 것 같지만, 백 대표는 꽤 특이한 이력을 자랑한다. 업계의 풍문으로는 프랑스에 거주 혹은 공부했다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다만 프랑스어를 어느 정도 유창하게 구사하는 정도라고. 그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후 개발자로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근무하던 중 90년대 중반 직접 소프트웨어 회사를 창업했다.
웹사이트가 우후죽순처럼 생기던 닷컴열풍 당시, 기술적으론 이미 전문가였던 그는 웹에 태울 콘텐츠의 중요성도 일찌감치 인식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평소 좋아하던 영화를 주요 콘텐츠로 하기로 마음먹는다. 당시 뉴욕에 거주하면서 매주 금요일 개봉 영화 정보를 상세히 실은 신문을 빼놓지 않고 봤는데 한국에는 개봉 영화 관련 정보 제공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느꼈고, 그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탄생한 게 90년대 후반에 론칭한 온라인 영화 정보 사이트 ‘씨네서울(cineseoul)’이다.
“매번 정보를 올리던 우리가 좀 늦거나 안 올리면 지상파 방송국에서 전화가 올 정도였죠. 포털에서도 우리 데이터를 많이 활용했고, 심지어 ‘씨네서울’이 버텨줘야 한다’는 소리도 수차례 들었다니까요.” 웹진 운영이 결코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영화계가 소위 돈이 넘치는 판이 아니다. 온라인 매체의 경영난은 두말하면 잔소리였을 터. 백 대표는 수입과 배급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씨네서울을 운영하면서 영화계 사람들과 아주 친해졌어요. 2000년대 초반은 한국의 누벨바그 혹은 르네상스라고 할 정도로 좋은 작품이 쏟아졌던 시기입니다. 그때가 참 좋았죠. 한국 영화에 일부 투자자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2003)에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호 투자자로 들어갔죠.”
“이후 자기 복제 같은 한국 영화가 많이 나왔고, 이를 보며 수입을 직접 해보기로 했어요. 칸필름마켓에 가보니 아무래도 상 받은 영화가 좋아 보이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유럽 특히 프랑스 영화를 많이 수입하게 됐죠. (웃음)” 박스오피스 등 흥행력에 관심이 집중된 현재보다 상대적으로 예술성을 높이 샀던 당시의 시류가 반영된 결과라는 것. 주목할 점은 판씨네마가 수입한 첫 영화 <추방된 사람들>(2004)를 비롯해 <트와일라잇><비긴어게인> 등 판씨네마가 수입하면 이후 영화제에서 수상하거나 기대치 않은 흥행을 거두는 일이 빈번했다는 것이다. 백 대표의 안목(?)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추방된 사람들> 이후로 유럽 예술 영화, 부탄 영화 <나그네와 마술사>(2003)까지 초기엔 아주 아트아트한 영화를 많이 소개했죠.”
120여 편에 달하는 판씨네마의 수입 목록 중 변곡점이 된 작품은 무엇일까. 백 대표에게 물었다.
“<트와일라잇> 수입 결정은 회사에 있어 큰 모험이었습니다. 배우와 감독 캐스팅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강력한 경쟁자가 있어 우리가 사올 가능성도 희박했고, 이전 영화들보다 가격도 매우 높았죠. 하지만, ‘흡혈귀와 평범한 인간의 러브스토리’라는 이야기가 가진 힘에 매료됐어요. 당시 여러 콘텐츠에서 장벽이 없는 게 로맨스의 장벽이라고 할 정도로 너무 쉽게 사랑이 이뤄지던 때라 금기의 사랑이 사람들이 가진 판타지 로맨스에 대한 로망을 충족시킬 것이라 믿었어요. 흥정하다 끝까지 결정되지 않아 결국 반 포기하고 돌아오던 중 팔겠다는 전화를 받았는데, 기쁘기보다 과연 잘한 일인가라는 걱정이 앞설 정도였어요. 2007년에 사서 2008년 개봉까지 거짓말 좀 보태서 매일 불안불안했죠” <트와일라잇>은 세계적으로 성공했고,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로버트 패틴슨은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으며 이후 4편의 후속편을 내놓았다. 2008년 12월 국내 개봉 당시 135만 명을 동원하는 등 국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트와일라잇>을 시작으로 예술영화 중심에서 상업·장르 영화로 범위를 넓혀갔어요. 2014년엔 <비긴 어게인>, 2016년엔 <라라랜드>가 크게 터져 흐름상 2018년을 기대했는데 없네요.(웃음)”
#Change
판씨네마는 올해에만 여성 감독과 배우가 주축이 돼 전하는 여성 서사 <라라걸><미스 비헤이비어>, 자국의 핵잠수함을 공격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다룬 잠수함 영화 <울프콜>, 브래드 피트의 리즈 시절 외모가 빛나는 <트로이 디렉터스 컷>을 개봉했다. 장르나 서사는 다르지만, 공통점은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영화라는 점이다.
“하고 싶은 일을 공유하는 동료들과 함께 즐겁게 일하자는 생각으로 판씨네마를 열었어요. 돈을 많이 벌기보다 영화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치고, 일자리 창출 등 작게나마 사회에 기여하고 싶거든요.” 처음 영화계에 발 들일 때부터 백 대표가 추구하는 가치는 변함없다. 하지만 영화를 수입하는 기준에는 변화가 생겼다. “젊은 시절엔 관객 입장에서 난해하더라도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고 무엇인가를 느끼게 하는 영화를 선호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관객이 보다가 힘들어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영화에는 별로 끌리지 않아요.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감정의 놀이동산’ 같은 영화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가 <라라랜드>예요. 오락적이면서 정말 여러 감정을 맛보게 하잖아요. 혹자는 여자(엠마 스톤)가 혼자만 꿈을 이룬 후 남자(라이언 고슬링)를 찼다고 욕하지만, 난 두 사람이 다 각자의 꿈을 이룬 거로 생각해요. 젊은 날의 사랑과 이별, 후회와 회한, 낭만과 설렘 등 현실적인 이야기를 일상과 다르게 접근하면서 사람의 감성적인 면을 깊이 건드리지 않나요.”
#Corona
2020년 코로나로 인해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의 영화계는 큰 타격을 입었다. 세계 영화 산업을 주도하는 북미의 극장은 문을 닫았고, 박스오피스가 집계를 멈춘 지도 어느새 6개월째에 접어들었다. 개봉이 미뤄진 것도 수십 편이고, IPTV로 직행한 <트롤: 월드 투어>를 비롯해 결국 OTT 플랫폼 디즈니+로 직행한 <뮬란>까지 극장 패싱이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게 됐다.
“수입업자 간의 경쟁이 심화돼 가격이 상승한 데다 수입된 영화 수도 너무 많은 게 현실이에요. 스크린을 배정받기는 점점 힘들어지고, 극장 측도 대기하는 영화가 많다 보니 길게 스크린을 잡아줄 수 없죠. 한마디로 ‘영화가 소모품화’되고 있습니다” 원래도 힘들던 업계에 코로나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작은 영화에게 스크린을 주지 않는 것의 폐단은 관객의 다양한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과 더불어 관객의 취향까지도 알게 모르게 변화시킨다는 거예요. 극장 관람 시 어느새 블록버스터만 찾게 되죠. 이번 코로나 사태 때 관객이 멀티플렉스에서 독립· 다양성 영화를 접할 기회가 오히려 많아졌어요. 이런 면에선 긍정적인 효과라고 할 수 있죠”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가 작은 영화들에 기회로 작용한 셈이다. 해외 대작과 국내 신작 개봉이 전무했던 3~5월 <프리즌 이스케이프>, <레이니 데이 인 뉴욕>, <엽문4: 더 파이널> 등이 코로나 사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스크린수를 확보하며 흥행에 성공한 것이 그 방증이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정도로 코로나는 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제작사가 꼭 영화라는 포맷을 고집하는 것은 어느새 구식이 됐고, 영화가 반드시 극장이라는 플랫폼을 거쳐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커지고 있다. 온라인 영화 정보 사이트에서 영화 수입과 배급으로 방향을 선회, 발 빠른 대처로 지금까지 업계의 굳건한 지킴이로 자리매김해온 판씨네마의 뉴노멀 전략은 무엇일까.
“그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라 무계획이 계획이랄까요. 다만 어떤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유연하게 가려고 합니다. 영화 수입의 경우 앞으로 프리바잉(사전구매)은 자제하고 거의 완성된 영화 위주로 가려 해요. 6월부터 사무실 외부 마당 한편에 영화 굿즈샵을 마련해 운영 중인데 처음이라 현재까진 반응이 뜨거운데, 좀 더 지켜봐야죠. 일단 주말에만 운영할 예정입니다. 또 사무실 4층에 있는 스크리닝 공간을 활용해 볼까도 싶은데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요. 주어진 자원을 한 곳에 올인하기보다 분산 투자해 다양한 시도를 해 본 후 방향을 잡아 나가려 합니다. 소프트웨어업을 하다 영화업을 했으니 또 다른 분야에 도전할 수도 있겠죠.(웃음)”
“또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제작비 일백만 불(약 12억 원)의 저예산에도 번득이는 아이디어와 플롯을 앞세워 호러 명가로 자리한 블룸하우스처럼 좁고 날카로운 영화를 제작해 보고 싶기도 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막연한 생각일 뿐,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는 백 대표, 새로운 제안이라면 언제든 두 팔 벌려 환영이란다.
[mail:eunyoung.park@movist.com]글 박은영 기자(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mail]
무비스트 페이스북(www.facebook.com/imovist)
사진. 박광희 실장(Ultra Studio)